좋은 곳에 자리한 오래된 절에 갔을 때, 이런 식의 사찰 설명문을 간혹 마주하곤 한다. “이 사찰은 신라 시대 창건했으나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졌다. 그 뒤 조선 후기에 지역 주민과 불교계가 힘을 모아 중건해 지금에 이른다.” 중건하지 않았다면, 그 ‘신라 사찰’은 지금 없다.
동남아지역 작은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소장품이 우리나라 박물관에서 보던 것보다 소박한 듯해 살짝 ‘우월감’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다 금세, 더 중요한 것은 나라 살림이 그다지 풍족하지는 않아도 앞선 세대가 남긴 역사·문화 유산을 이렇게 어떻게든 보전하려는 노력 그 자체임을 깨닫고 그 우월감이 머쓱하고 부끄러워지곤 했다.
대만 타이베이의 송산문창원구(1939년 지은 담배공장 건물을 보존하면서 문화적으로 재생), 화산1914 문화창의원구(1914년 지은 양조장 건물을 보존하면서 문화적으로 재생)는 도심 옛날 공장·창고 건물을 어떻게든 보존하겠다고 결정한 뒤, 그에 맞춰 예술·문화·상업·휴식·창의를 입혔다. 도시의 뿌리를 간직하면서 시민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결국 만들어냈다. 서병수 시장 시절 문화시설로 ‘재생’하기로 결정한 부산 중구 옛 한국은행 부산지점 건물은 1963년 지은 것이다.
자기 것을 소중히 여겨 잘 가꾸고자 최대한 노력하고, 역사·문화 유산을 오늘 되새기는 공동체는 미래를 향해 지혜롭게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것이 ‘문화력(文化力)’이다.
작은 기미에서 큰일을 짐작할 수 있다. 바깥출입을 통 안 하다가도 뜰에 뒹구는 낙엽 한 장을 문득 보고 천지에 가을 기운이 스며들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저수리조합’을 둘러싼 최근 논란을 보면서, ‘문화도시 부산’을 향한 정책과 인식이 어떤 형편에 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개별 구청의 정책 판단 문제를 넘어선다. 총체적 문화 인식이 여기 반영돼 있다.
부산 강서구청이 대저수리조합(강서구 대저동) 건물을 부수겠다고 결국 나섰다가, 지역문화계의 문제 제기로 일단은 멈춰 선 상태에 와 있다. 대저수리조합 건물은 1916년 일제강점기에 ‘창건’했다가 6·25 전쟁 등 세월의 풍파 속에 1952년 불타 사라졌다. 그 뒤 1956년 유엔이 ‘중건’해 지금에 이른다. 이 건물에 붙어 있는 비료창고는 1916년 당시 모습을 간직했으며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참고로 부산 중구 부산근대역사관이 처음 동양척식회사 부산지점 건물로 지어진 것은 1929년이다.
세월의 더께를 얹어가며 긴 세월 버텼고, 문화 숨결까지 불어 넣게 된 이 공간이 하필 지금, 그것도 민간 상업 개발이 아니라, 공공기관의 판단으로 철거 위기에 처한 이유가 뭘까? 대저수리조합 뜰에 가서 앉아보니 ‘위치가 너무 좋은 게 이 위기에 처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저수리조합은 도시철도 3호선 강서구청역 곁에 붙어 있다.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지역 행정 중심인 강서구청의 앞마당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가까워 편의성도 있다. 게다가 평지다. 부산의 문화·역사 자산 가운데 평지·요충에 있던 것은 개발 시대에 숱하게 사라졌다. 100년 된 근대 건물을 찾는 게 쉽지 않은 것이 ‘근현대 한국의 관문 도시’ 부산 상황이다.
부산은 산이 많다. 산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나온다. 그래서 경사가 심하다. 오죽하면 부산의 상징 중 하나가 계단이겠는가. 평지에 자리한 부경대 대연캠퍼스를 빼면, 부산의 대학 20여 곳 가운데 편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캠퍼스조차 드물다.
입지가 그러하다 보니, 벼농사의 문화·역사나 너른 들판의 상상력·기억은 모자란다. 대저 일대 평야가 절묘하게 이 틈을 메운다. 멀게는 가야 시대 역사에 가서 닿고, 좀 더 가까이 오면 일제강점기 농민의 삶을 품고, 더 다가서면 고도 성장기 한국과 부산을 먹여 살린 지역의 자부심으로 이어진다. 대저수리조합과 비료창고 건물은 그런 문화·역사에서 드물게 남은 꼭짓점에 있다. 게다가 지금도 지역문화 공간으로 구실을 하면서 시간을 쌓아간다.
대저수리조합 건물이 어떤 종류의, 어느 정도의 불편이나 장애를 주기에 철거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지는 상세히 알지 못 한다. 이 점은 담당 기관에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해두고 싶다. 문화도시를 역사·문화자산이 풍부한 곳에서나 추진할 수 있는 일 또는 누군가 만들어주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는 많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대저수리조합 건물을 누군가 상업 개발을 위해 철거하려고 들면, 행정기관은 화들짝 놀란 듯 달려들어 일단은 말리고 나서는 시스템이 작동해야 문화도시를 꿈꿀 수 있다. 그리고 뒷세대에게 긍지와 상상력을 선물할 수 있다. ‘문화도시 부산’의 꿈이 자꾸 멀어져 간다.
편집국 부국장 겸 인문연구소장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