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세상 보는 눈은 달라지는 법. 여기에는 남녀와 노소가 따로 없고, 동서와 고금이 따로 없다. 위치가 집권여당으로 바뀌었으니, 혹시나 하는 노파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실행하기가 간단한 문제가 아닌 탓이다. 더욱이 다음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야 할 때도 됐다. 여론 향배가 중요해진 것이다.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지도 모르는 인기 없는 정책이기에. 가진 자만이 아니다. 저소득층도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증세 없는 복지. 박근혜 정부 내내 뜨거웠던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박근혜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사안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경제 민주화와 복지를 공약의 전면에 내세워 재미를 톡톡히 봤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에게 월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은 파괴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집권 후 박 전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란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면서 많은 복지 공약을 실천하려 했다. 누리 과정처럼 예산이 부족해 매년 논란이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정작 올린 건 담뱃세 주류세 주민세 등이다. 연말정산 공제 축소 등의 대책도 나왔다.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데 기분 좋은 사람이 어디 있나. 그것도 서민 주머니를 먼저 턴 것이다.
복지란 무엇인가. 주머니 속 돈을 조금씩 덜어내서 서로 나눠 쓰는 것이 아닌가. 복지라는 권리를 누리려면 납세라는 의무가 뒤따라야 한다. 복지를 더 확대 하려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그래야 시스템이 구축된다. 그런데 증세 없이 복지를 하겠다니, 말이 되나. 상황이 이쯤 되니까 박 전 대통령은 애당초 복지 시스템을 구축할 생각이 없었다는 의심을 받았다. 대선 때 특정계층 표를 의식해 공약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여론이 일었다. 박근혜 정부의 불행은 이때 예고됐던 듯하다. 당시 박근혜 정부 복지정책의 철학 부재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게 야당이다. 바로 지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다.
그 후 여야가 교체됐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주변 여건도 증세를 논의하기에 좋아졌다.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은 위기 극복을 위해 40조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3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다 막대한 재원이 소요될 사회정책인 전 국민 고용보험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장기적으로는 2030년 이후 급속한 고령화로 경상수지 적자가 예상되는 것도 대비해야 한다. 사회안전망에 대한 국민적 인식 역시 높아졌다. 긴급재난지원금과 긴급고용안정지원금 등이 결정적이다. 이를 확대하고 사회시스템으로 구축하려면 납세라는 의무가 뒤따라야 한다. 국가 수입은 세금이다.
게다가 이제 야당조차 기본소득제 도입을 거론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에서는 2022년 대선을 대비해 기본소득제란 이슈를 선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는 당장 증세 논의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국책 연구기관이 잇달아 증세 필요성을 제기하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어찌 보면 올해가 증세를 논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 모른다.
신분이 바뀌면 현실 인식도 달라지는 걸까. 아직도 정부가 증세를 추진한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올 7월 발표 예정인 세법개정안 등 중장기 재정 밑그림에도 증세는 담기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정부는 그 많은 예산을 어디서 조달하겠다는 말인가. 다른 예산을 줄여 복지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지금의 긴급재난지원금처럼. 하지만 임시방편이다. 일회성으로 끝난다. 만약 국채를 발행하면 정부 빚은 늘어난다. 그렇다고 부자에게 기부를 받아서 해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무릇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올 세법 개정안에 중장기적인 증세의 틀이 담겨야 2~3년 후 실제 증세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를 내년으로 넘기면 증세 논의는 또다시 몇 년 더 늦어질 수 있다. 그다음 해가 대선인 탓이다. 그때 주변 여건이 지금처럼 갖춰진다는 보장도 없다. 일부 전문가는 올해를 넘기면 논의 자체가 힘들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이 공론화할 적기란 주장이다.
지금 정부의 애매한 대처가 전 정권처럼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원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여론 추이를 고려한 속도 조절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다가 때를 놓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증세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부자 증세’를 할지 ‘보편 증세’를 할지, 구체적으로 얼마나 올릴지 등등. 많은 논쟁과 시간이 필요한 사안이다.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론화를 빨리하자는 것이다.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