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인문학 칼럼] 용서하지 않는 여성 /윤성덕

근절 없는 女 대상 범죄 개인 아닌 사회적 책임, 익명성 탓 피해자 확산

여성들 처벌 포기 안돼, 끝까지 추적해 엄벌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5-20 19:38:14
  •  |   본지 19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지난 2, 3년 동안 ‘미투운동’ 때문에 한국 사회가 떠들썩했는데, 올해는 ‘박사방’ 또는 ‘n번방’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시 한번 여성 대상 범죄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 경찰청 특별수사본부가 관련자들을 구속수사하고 있고, 많은 국민이 이들을 엄중하게 심판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 사회 안에서 폭넓게 자행되고 있는 여성 관련 범죄의 일부분일 뿐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1~2016년 여성이 살인범죄의 피해자인 경우는 연간 400건 이상, 성폭력범죄 접수는 연간 3만7808명, 가정폭력 검거 인원은 연간 5만3511명, 성매매 검거 인원도 연간 4만5041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여성폭력 관련 지표).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는 여성을 범죄에서 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박사방’ 사건은 이러한 사회적 추세가 어디까지 와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성범죄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고대 서아시아의 문학작품 중 ‘인안나와 슈칼레투다’라는 신화가 있다. 남자 주인공인 슈칼레투다는 농부였는데, 자기 밭에 물을 주고 채소를 키워도 얼마 가지 않아 다 말라 죽게 만드는 한심한 자였다. 자기도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하늘을 보며 신들의 도움을 구하는데, 갑자기 자기 밭 한가운데 어마어마한 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며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그늘 아래에는 어떤 여인이 누워서 잠들어 있었는데, 그녀는 신적인 능력 일곱 개를 무기처럼 허리에 차고 있는 여신 인안나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던 슈칼레투다는 그녀에게 제물을 바치고 복을 비는 대신,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벗기고 그녀를 범하고 도망한다.

아침이 밝아 잠이 깬 인안나 여신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고 분노한다. 갑옷과 무기를 차고 전쟁의 여신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 지역 샘과 우물에 있는 물을 모두 피로 변하게 했고, 무서운 폭풍우를 불러왔으며, 나무와 건물을 넘어뜨려 사람이 길을 다닐 수 없도록 만들었다. 범죄자를 내놓으라는 시위였다. 슈칼레투다는 거주민이 많은 도시로 가 사람들 틈에 숨어서 지냈는데, 인안나 여신이 무지개를 만들고 더 큰 바람을 불러오자 두려움에 혼자 산 속으로 도망한다. 그러나 도시를 떠난 슈칼레투다는 곧 인안나 여신에게 잡히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 신화는 영웅이면서도 한없이 약하고 아름답기만 한 여성이라는 남성들의 환상을 기초로 창작되었지만, 그 외에도 생각해야 할 주제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인안나 여신은 자신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잡기 위해 도시 거주민들 전체를 벌했고, 범인은 도시에 숨어 있는 동안 여신에게 잡히지 않았다. 성범죄는 남성 개인의 일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책임은 사회에 있다는 것이다.

성행위가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관계가 아니라,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일방적인 폭력이 되어도 좋다고 가르친 것은 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범죄를 저지르고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고, 또 다른 범죄를 계획할 수 있는 이유도 그 사회의 익명성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의 얼굴을 내걸고 사는 사회라면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

둘째, 포기하지 않고 범인을 끝까지 따라가서 그 책임을 지게 만들려면 용서하지 않는 여성이 필요하다. 사회 전체가 범인을 싸고돌며 오히려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손가락질할 때, 그를 숨겨주는 사회를 벌하고 끈질기게 범인을 잡아서 사형에 처한 것은 피해자인 여성이었다.

셋째, 범인을 잡을 때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은 무지개였다. 무서운 홍수와 폭풍우로도 잡지 못한 범인을 무지개로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화는 대답해주지 않고 우리가 해석할 과제로 남긴다. 고대 서아시아의 영웅신화에서 주인공들이 활을 무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지개가 활이고 바람이 화살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여성의 마지막 무기가 하늘 끝에서 끝까지 닿는 찬란한 무지개라는 점은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무지개는 비바람이 그친 뒤에 뜨고 또 여러 색깔로 빛난다. 그렇다면 무지개는 범인을 심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자를 안고 보호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피해자인 여성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그 사회 안에서 서로 다른 색깔로 빛나던 여성들이 연대해서 바로잡을 수 있다고 읽으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직 철기시대에 접어들지 못했던 서아시아 지방의 신화는 사회적 책임과 여성의 정의로운 분노와 연대에 기초한 공존을 요청한다. 이 문제가 곧 내 문제일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문제일 수 있다는 연대의식을 가지고 현대 한국 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건국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원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롯데, 공격서 수비로 중심 이동…주전 새판짜기 예고
  2. 2부산시 “북항에 5만 석 돔 아레나” 유치의향서 제출
  3. 3지광, 국회 동행명령 끝내 불응…여야 “즉시 고발”
  4. 4부단체장 출퇴근 의전 고수하던 4개 구·군, 결국 폐지
  5. 5주민이 낸 감사청구서, 피감부서로 떠넘긴 부산시
  6. 6이태원 악몽 겪고도…서면 ‘만취길’ 대응 탁상공론
  7. 7영도 중리해변 알박기 텐트, 1개 더 늘었다
  8. 8[눈높이 사설] 부캉이가 알려준 부산관광의 새로운 가능성
  9. 9“르노 부산, 글로벌 개발·생산거점” 쐐기
  10. 10동부산 시민 만난 전재수 “산은 유치·동남투자공사 동시 추진”
  1. 1지광, 국회 동행명령 끝내 불응…여야 “즉시 고발”
  2. 2조현, 한미관계 난기류 우려에 “벨트 단단히 매면 돼”
  3. 3민주 “조희대 국정조사 실시”…국힘 “탄핵보다 더 비열”
  4. 4국힘 “공소취소 특검 전에 3+1 조작 특검 국조부터”
  5. 5국감 출석 거부한 지광(국제신문 대주주)에 국회 ‘동행명령’(종합)
  6. 6시설공단 이사장 후보 자진사퇴…田 인사 첫 낙마
  7. 7"농지조사 송 장관이 제안" 이 대통령에 野 "불리해지니 장관 탓"
  8. 8김정호 "국제신문 100억 체불 지광, 동행명령장 거부시 고발조치"
  9. 9중수청장 “한동훈 딸 의혹 규명 필요”(종합)
  10. 10김지용 중수청장, 또다시 국무회의 참석
  1. 1“르노 부산, 글로벌 개발·생산거점” 쐐기
  2. 2애플 ‘아이폰듀오’ 화면 결함 인정, 무상 교체 방침(종합)
  3. 3부산국제금융진흥원장 최병호
  4. 4내년 상반기 재가동…한빛 등 7기도 연장 속도(종합)
  5. 5부산시 벤처펀드 받은 유망기업 ‘쑥쑥’…IPO 도전
  6. 6강연 통역하고 요금 모니터링…관광·마이스산업 AI 바람
  7. 7“임기내 부산 1호 유니콘기업, 기업공개 2건 목표”
  8. 8주가지수- 2026년 10월 27일
  9. 9부산경실련 “산은 이전 없다는 금융위원장 발언 유감”
  10. 10애플, 아이폰듀오 화면 결함 인정…무상교체 방침
  1. 1부산시 “북항에 5만 석 돔 아레나” 유치의향서 제출
  2. 2부단체장 출퇴근 의전 고수하던 4개 구·군, 결국 폐지
  3. 3주민이 낸 감사청구서, 피감부서로 떠넘긴 부산시
  4. 4이태원 악몽 겪고도…서면 ‘만취길’ 대응 탁상공론
  5. 5영도 중리해변 알박기 텐트, 1개 더 늘었다
  6. 6[눈높이 사설] 부캉이가 알려준 부산관광의 새로운 가능성
  7. 7동부산 시민 만난 전재수 “산은 유치·동남투자공사 동시 추진”
  8. 8“국제신문 회생 더이상 미룰 수 없어”…전재수 시장, 지광에 공식서한 보내
  9. 9[한 손 뉴스] 변호사 업무 재개한 홍준표, 대선 경선 관계자 변호 맡아(종합)
  10. 10법원 “부하직원 횡령, 감독 안 한 상급자 견책 정당”
  1. 1롯데, 공격서 수비로 중심 이동…주전 새판짜기 예고
  2. 2‘무관의 제왕’은 옛말…케인 발롱도르 품었다
  3. 3허구연 KBO 총재, 3연임 사실상 성공
  4. 4K리그2 준PO 12월 2일 개최
  5. 5롯데 자이언츠 신임 감독 이동욱·단장 이택근(종합)
  6. 6올해 딱 한 번 지고 66번 이겼다
  7. 7차준환 계보 잇는 피겨 왕자 서민규
  8. 8똑똑한 ‘데이터 야구’와 수비 강화…개혁의 칼 뽑은 롯데
  9. 9[뭐라노] 데이터 기반 똑똑한 야구·수비강화…롯데의 ‘새판 짜기’
  10. 10[뭐라노] 아직도 '그들만의 체전'?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지역이 기획, 국가가 지원하는 R&D 시대 열자
진짜 질문의 시작
국제칼럼 [전체보기]
부캉이에게 부끄러운 북항 재개발 민낯
부산 관광, 마냥 좋기만 할까
기고 [전체보기]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의 과제
배의 피부를 지키는 기술은 도장이다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AX·반도체 전시회 5개 동시에 열렸는데…
북극항로, 첫 배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배다
도청도설 [전체보기]
어떤 ‘최장수’ 기록
프랑스를 망친 결정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개정 응급의료법이 ‘미수용 방지법’?
25년을 간직한 리플렛 세 장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캉이’ 스펙터클에서 공존으로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사설 [전체보기]
국회 동행명령 외면한 지광스님, 법적 책임 물어야
북항 돔 아레나 유치전, 사업 타당성이 성패 가른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한국 경제 떠받치는 중장년, 이제 다시 봐야
AI 시대, 평가의 진정성을 묻다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두 미술관, 각자의 역할을 묻다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의 ‘필요 원칙’과 포퓰리즘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대규모 대미 투자, 기회인가 위협인가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사람은 갔어도 명당은 남아 있다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와인은 어떻게 마음에 남는가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시민 주거안정에서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청년 떠나는 지방, 수도권 인구 분산해야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