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 3년 동안 ‘미투운동’ 때문에 한국 사회가 떠들썩했는데, 올해는 ‘박사방’ 또는 ‘n번방’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시 한번 여성 대상 범죄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 경찰청 특별수사본부가 관련자들을 구속수사하고 있고, 많은 국민이 이들을 엄중하게 심판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 사회 안에서 폭넓게 자행되고 있는 여성 관련 범죄의 일부분일 뿐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1~2016년 여성이 살인범죄의 피해자인 경우는 연간 400건 이상, 성폭력범죄 접수는 연간 3만7808명, 가정폭력 검거 인원은 연간 5만3511명, 성매매 검거 인원도 연간 4만5041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여성폭력 관련 지표).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는 여성을 범죄에서 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박사방’ 사건은 이러한 사회적 추세가 어디까지 와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성범죄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고대 서아시아의 문학작품 중 ‘인안나와 슈칼레투다’라는 신화가 있다. 남자 주인공인 슈칼레투다는 농부였는데, 자기 밭에 물을 주고 채소를 키워도 얼마 가지 않아 다 말라 죽게 만드는 한심한 자였다. 자기도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하늘을 보며 신들의 도움을 구하는데, 갑자기 자기 밭 한가운데 어마어마한 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며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그늘 아래에는 어떤 여인이 누워서 잠들어 있었는데, 그녀는 신적인 능력 일곱 개를 무기처럼 허리에 차고 있는 여신 인안나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던 슈칼레투다는 그녀에게 제물을 바치고 복을 비는 대신,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벗기고 그녀를 범하고 도망한다.
아침이 밝아 잠이 깬 인안나 여신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고 분노한다. 갑옷과 무기를 차고 전쟁의 여신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 지역 샘과 우물에 있는 물을 모두 피로 변하게 했고, 무서운 폭풍우를 불러왔으며, 나무와 건물을 넘어뜨려 사람이 길을 다닐 수 없도록 만들었다. 범죄자를 내놓으라는 시위였다. 슈칼레투다는 거주민이 많은 도시로 가 사람들 틈에 숨어서 지냈는데, 인안나 여신이 무지개를 만들고 더 큰 바람을 불러오자 두려움에 혼자 산 속으로 도망한다. 그러나 도시를 떠난 슈칼레투다는 곧 인안나 여신에게 잡히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 신화는 영웅이면서도 한없이 약하고 아름답기만 한 여성이라는 남성들의 환상을 기초로 창작되었지만, 그 외에도 생각해야 할 주제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인안나 여신은 자신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잡기 위해 도시 거주민들 전체를 벌했고, 범인은 도시에 숨어 있는 동안 여신에게 잡히지 않았다. 성범죄는 남성 개인의 일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책임은 사회에 있다는 것이다.
성행위가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관계가 아니라,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일방적인 폭력이 되어도 좋다고 가르친 것은 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범죄를 저지르고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고, 또 다른 범죄를 계획할 수 있는 이유도 그 사회의 익명성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의 얼굴을 내걸고 사는 사회라면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
둘째, 포기하지 않고 범인을 끝까지 따라가서 그 책임을 지게 만들려면 용서하지 않는 여성이 필요하다. 사회 전체가 범인을 싸고돌며 오히려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손가락질할 때, 그를 숨겨주는 사회를 벌하고 끈질기게 범인을 잡아서 사형에 처한 것은 피해자인 여성이었다.
셋째, 범인을 잡을 때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은 무지개였다. 무서운 홍수와 폭풍우로도 잡지 못한 범인을 무지개로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화는 대답해주지 않고 우리가 해석할 과제로 남긴다. 고대 서아시아의 영웅신화에서 주인공들이 활을 무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지개가 활이고 바람이 화살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여성의 마지막 무기가 하늘 끝에서 끝까지 닿는 찬란한 무지개라는 점은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무지개는 비바람이 그친 뒤에 뜨고 또 여러 색깔로 빛난다. 그렇다면 무지개는 범인을 심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자를 안고 보호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피해자인 여성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그 사회 안에서 서로 다른 색깔로 빛나던 여성들이 연대해서 바로잡을 수 있다고 읽으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직 철기시대에 접어들지 못했던 서아시아 지방의 신화는 사회적 책임과 여성의 정의로운 분노와 연대에 기초한 공존을 요청한다. 이 문제가 곧 내 문제일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문제일 수 있다는 연대의식을 가지고 현대 한국 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건국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