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세종청사를 오가다 대전에 사는 부산 출신 사람을 알게 됐다. 고향 떠나온 지는 오래이고 아이들도 그곳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부산에 계시는 어머니를 뵙는 일을 뺀다면 남쪽으로 내려갈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사투리도 잘 쓰지 않는다.
이만하면 거의 충청도 사람이 됐을 법하다. 그런데 프로야구 말만 나오면 신기하게도 사정이 달라진다. 그는 ‘골수’ 롯데 자이언츠 팬이다. 여전히 ‘롯데에 죽고 산다’. 지난해에는 롯데가 정규리그에서 꼴찌를 했지만, 올해는 다를 거라며 열변을 토한다. 그럴 때 보면 영락없는 부산 사람이다. 이제는 사는 곳의 팀을 응원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외국에 나가보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고향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늘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게 마련이다.
이런 이들에게 최근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은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좀처럼 대하기 힘든 지자체 수장의 성 추행 사건이 터진 뒤부터다.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때문이지 관련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불쑥 이런 저런 질문을 한다. 호기심에서 묻는 거라면 그나마 이해가 된다. 그런데 때로는 듣기 거북한 말도 나온다. “민주화의 성지가 어쩌다가 그렇게 됐냐”부터 “부산 사람들 참 창피하겠네” “부산이 그렇지 뭐”라는 식으로 발언이 이어지면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해지기 마련이다.
나고 자란 곳, 오랫동안 삶의 터전이었던 곳이라 해서 지상낙원일 리는 만무하다. 그렇지만 자랑은 하지 못할지언정 비아냥거리는 말을 타지에서 듣고서도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이 사안을 두고 정치권이 공방을 벌이는 것은 예상됐던 일이다. 지난 총선에서 진 야당은 주도권 회복을 위해서라도 거센 공세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당연히 여당은 필사적으로 방어해야 한다. 앞으로 수사가 진행되면 누구의 주장이 옳았는지는 곧 밝혀진다. 그러나 어떤 결론이 나오든 부산 사람의 가슴에 새겨진 생채기는 쉬이 아물지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땅에 떨어진 부산의 위상 역시 쉽게 회복하기 힘들 수 있다.
‘부산이 우리 나라 제 2의 도시’라는 말은 한 때 진리에 가까웠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과연 앞으로도 이 등식이 유효할까. 확신하기 어렵다.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가 그렇지 않은 이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최근 발표된 여러 지표는 부산의 ‘제2 도시 수성’이 만만치 않음을 알리고 있다. 인구는 다른 도시에 추월당할 위기에 몰렸다. 전체 경제력도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들던 때는 오래 전 의 일이 됐다. 게다가 주민의 평균 연령은 44.5세로 특·광역시 가운데 가장 높다. 미래 동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10년 뒤 부산의 모습이 걱정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마당에 시장 부재라는 대형 악재마저 터졌으니 참 허탈한 일이다.
다행히 지역에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반갑다. 부산시는 시장 권한대행을 중심으로 공직사회 고삐를 죄고 있다. 조직을 추스르는 한편 사회 각계와 소통도 강화 중이다. 머뭇거리다가는 내년 시장 보궐선거 때까지 남은 1년이 무주공산으로 흘러갈 우려도 있다는 절박감을 인식한 행보로 보인다.
상공계는 동남권 관문공항 건설 등 전임 시장이 추진하던 지역 현안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힘껏 돕겠다고 밝혔다. 부산시와 경제계 간 적극 소통도 주문했다. 코로나19 여파로 부산 경제가 고사 직전에 이른 현실을 고려할 때 시와 상공계의 협력은 필수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정치권에서는 야당이 여야와 지역 상공계가 참여하는 협의체를 만들자고 부산시에 제안하고 나섰다. 혹시 깔려 있을 지도 모를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제외한다면, 야당의 이런 시도를 애써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물론 워낙 변수가 많은 만큼 일련의 계획이 제대로 진척될지는 성급하게 단언하기 힘들다. 그래도 민·관·정이 어떻게든 시장의 중도 사퇴로 인한 공백을 메워야 한다며 머리를 맞댄 것은 아주 고무적이다. 네 탓, 내 탓을 하기에는 부산이 처한 상황이 워낙 심각하기 때문이다.
부산이 자초한 위기는 스스로가 푸는 것이 최선이다. 누가 문제를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떨어진 부산의 자존심 회복도 구성원의 몫이다. 부산은 역사의 중요 고비마다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저력이 발휘됐던 곳이다. 그 힘이 다시 살아나길 기대한다. 이건 타지에서 고향을 바라보는 부산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할 터다.
세종본부장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