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한반도를 지배해온 철학은 이른바 ‘중화 중심주의’였다. 조선은 명이 망한 뒤에도 유교적 문명질서를 지키는 ‘소중화’를 표방해왔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의 기준이나 롤 모델은 일본으로 변했다. 철도·병원 같은 근대적 문물은 물론 정치·경제·선거 같은 개념어들까지 일본을 통해 이식되었다. 그래서 박정희정부 시대 실무진이 새로운 제도나 법을 건의하면 장관의 첫 반응은 “그거 일본에 있는 거야?”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한국 기업의 성공적인 신사업은 일본에서 자리 잡은 아이템을 먼저 들여오는 기업인들의 몫이었다. 일본의 선진 경영시스템은 일종의 바이블이었다. 세계 1위의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의 ‘카이젠(개선)’을 본받는 것은 한국 경영자의 핵심과제였다.
지난 4월 15일 21대 총선이 열렸다. 우리나라는 2002년부터 전자개표를 도입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점은 한국은 전자개표를 먼저 하고 사람이 검표를 하는 데 비해 일본은 순서가 반대이다. 또 다른 점은 한국은 누르기만 하면 날인 되는 투표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일본은 아직도 직접 연필로 후보자의 이름을 기입해야 한다. 일본의 전자개표방식은 손으로 쓴 글씨를 모두 판독할 수 있는 고도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처럼 ICT 기술의 이용에 있어 일본과 한국은 많은 부분이 다르다. 일본은 기존 관행을 유지하면서 편리성을 높이는 이른바 ‘개선’을 궁극적인 단계까지 추진하는 나라다. 신칸센의 개찰구도 그렇다. 티켓이 더럽혀져도, 거꾸로 넣어도 모두 판독이 되는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한다. 한국은 어떨까. 개출구를 아예 없앴다. 기차를 타면 차장이 태블릿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며 부정승차를 확인하는 정도이다. 일본이 ‘개선’이라면 한국은 그야말로 ‘혁신(innovation)’이다. 어느 시스템이 더 효율적인가.
한국의 은행에서는 사인만으로 통장개설이 가능하다. 종이문서를 보기 어려운 기업이나 기관도 많아졌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의 경우 ‘페이퍼리스(paperless) 활성화’ 지원기관으로 몇 년전부터 모든 문서는 전자결재로 처리한다. 일본은 아직도 대부분 도장을 요구한다. 오죽하면 히타치가 인공지능으로 서류의 도장 직인란을 파악해 자동으로 도장을 찍어주는 로봇을 내놓을 정도이다. 일본의 ‘개선’이 아날로그 시대의 선형 방식이라면 한국의 ‘혁신’은 비선형(non-linear) 방식이다. 제조업 중심의 3차 산업시대에 필요한 재능이 ‘개선’이었다면 4차 산업혁명은 ‘혁신’이다.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민족이 한국인이다.
4차 산업혁명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계를 건너뛰는 퀀텀점프가 가능하다. 그래서 은행도 없는 아프리카에서도 모바일 페이 시스템이 가능한 것이고 북한이 개방을 한다면 4차 산업혁명의 테스트베드가 될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몇 십 년째 말뿐인 동북아해양시대의 수도는 어떨지 모르지만 ‘블록체인 특구’인 부산이 블록체인 허브가 되는 것은 그래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에서도 한국은 그 혁신적인 재능을 여실없이 보여주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앞으로의 세계는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라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은 엄청난 위기에 민주적으로 잘 대응해 세계적 모델이 되고 있다”고 했다.
19세기 이후 한국은 ‘근대화’가 ‘서구화’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근대화’의 개념이나 제도도 직수입도 아닌 일본을 거쳐 이식된 ‘일본 버전’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연의 진화과정에서 우월한 종이 열등한 종을 누르는 것처럼 ‘사회적 진화론’에 따라 미개한 조선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었다. 1950년대에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영국 ‘더 타임스’의 조롱까지 받았다. 경제 권위지인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최근 3년 연속으로 한국의 민주화 지수를 일본과 미국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다. 2019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30-50’클럽에 세계 7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경제 규모도 세계 11위이다.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은 손흥민의 나라, BTS와 영화 ‘기생충’의 나라, 휴대폰 잘 만드는 나라에서 이제는 민주적이면서 성숙한 공동체 의식을 가진 나라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선진국’들이 앞다투어 한국 의료시스템을 배우려는 것을 보면서 ‘오리엔탈리즘’의 시대가 끝나고 ‘문명사의 대전환’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100년 전 조선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After Corona 시대’의 표준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 ICT기술의 발달과 민주적 정부, 성숙한 시민의식이 결합한 새로운 ‘국가사회’ 모델의 출범 말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