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세가 위축되자 서구와 일본 등 외세가 밀려들어 와 각 문화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전통미술도 서구 미술에 밀려 갈 길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시각 미술이던 남종문인화와 궁중 미술은 일본화에 밀려 점차 사라져 갔다. 또한, 평민이 병풍이나 벽장으로 썼던 일명 ‘속화(俗畵)’는 찢어지고 낡게 되자, 깨끗하게 출력된 인쇄본 그림으로 덮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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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화조 그림. 원래 병풍의 일부였다. |
나무에 핀 큰 꽃과 작은 새를 그린 이 특이한 화조 그림도 본래 ‘8폭 병풍’ 중 한 점이었는데, 인쇄 그림으로 덮여 있던 것이었다. 다행히 일제강점기 즈음 겉면을 제거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림의 구성이 서양 추상 그림 못지않게 기발하다. 나뭇가지는 직각의 직선으로 구성하고, 잎과 꽃은 둥글고 크게 매달았다. 꽃의 생김새나 채색은 과장되어 강렬하다. 이에 반해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매우 작게 그려 현실 속의 자신들을 표현하듯 해학적인 사고를 드러내, 가장 창조적 발상이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이런 혼란기에 있던 속화에 대해 연구를 처음 시작한 이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었다. 특히 조선 평민문화를 좋아했던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는 속화에 매료되어 수집하는 한편 연구에 전념하여 민족학적 의미로 ‘민화(民畵)’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하였다. 그는 좋은 도자기나 민화 등 조선 민속품을 많이 수집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조선민족박물관’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미술을 ‘선(線)’과 ‘백색(白)’에 관심을 두어 ‘비애의 미’로 단정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각은 한국의 미감을 건강한 에너지보다는 소극적이고 애상에 젖은 부정적인 정서로 인식하게 하였다. 이 관점은 민족주의적 입장을 가진 국내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극복해야 할 견해로 지적되었다. 실제 해방 이후 여러 민화 연구자에 의해 민화에 대한 여러 새로운 관점이 생겼다. 그럼에도 현대 일부 학자는 여전히 과거 야나기 무네요시의 관점에 기대어 무비판적 찬사를 보내는 등 퇴행적 연구 태도를 보인다.
어떤 연구자들은 마치 야나기 무네요시의 환생처럼 민화 해석을 답습하여, 그동안 한민족의 내재적 발전관에 기대어 연구해온 견해를 부끄럽게 한다. 이제 민화 연구는 연구자 스스로 입장에서 자기 견해를 밝혀야 할 때이다. 당당히 이식문화에서 벗어나 한국 역사나 한국인 삶에 기초를 둔 연구 성과를 내어 한국의 자랑스러운 민화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