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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칼럼] 재난기본소득, 정명(正名) 아니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4-23 19:07:09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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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실질이나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는 명칭이 정확해야 한다. 고양이에게 호랑이라는 명칭을 붙인다면, 이는 진실의 왜곡이다. 그래서 정명(正名)이 중요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 널리 회자된 재난기본소득은 정명이 아니다. 실질이 명칭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쁜 건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용어가 정치적 의도 하에 공격적으로 제기되고 확산됐다는 사실이다. 정명(正名)이 아닌 것이 버젓이 통용되는 상황을 용납해선 안 된다. 특히 그것이 포용적 복지국가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림 서상균
지난 16일 정부는 소득하위 70% 국민에게 4인 가구 기준으로 재난지원금 100만 원을 지급하기 위해 제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총소요재정 9조7000억 원 중 지자체가 부담할 2조1000억 원을 제외한 7조6000억 원이 이번 추경에 담겼다. 지난 20일 정세균 총리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소득상위 30%가 제외된 데 대해 형평성과 한정된 재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하면서 재난지원금의 즉각적인 집행을 위한 신속한 추경 처리를 당부했다.

그런데 최근까지 다수 언론과 평론가는 재난지원금을 재난기본소득이라고 언급했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지자체들이 지급한 선별적 재난지원금도 재난기본소득으로 홍보됐다. 잘못된 것이다. 재난지원금은 기본소득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잘못된 용어가 갑자기 확산됐을까. 그것은 정명이 아닌 용어가 정치적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공세적으로 제기되면서 무차별적으로 언론에서 언급되고 인용됐기 때문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재난기본소득의 공론화를 시도했다. 지난 3월 19일 이 지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재난기본소득 지급을 요청했다. 같은 달 21일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에게 재난기본소득을 당론으로 정해달라고 촉구했고, 그날 오후 ‘홍남기 경제부총리님께 드리는 고언’을 통해 재난기본소득을 대통령께 건의해달라고 요구했다.

코로나19 재난을 맞아 정치적 영향력이 큰 경기도지사가 공세적으로 요구했던 재난기본소득은 연일 방송과 신문에 보도됐고 SNS 등을 통해 확산됐다. 이후 많은 정치인과 논객이 이 왜곡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우리는 정명이 아닌 용어가 정치적 목적 하에 버젓이 확산됐던 데 따른 후과가 심각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재난을 기회 삼아 등장한 기본소득제도가 포용적 복지국가로 가는 여정에 걸림돌로 작용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생계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소득을 지원한다는 식의 일반명사가 아니다. 기본소득은 특정 실질에 상응하는 고유명사로 복지국가제도에 버금가는 거대 담론이다. 기본소득제도의 실질을 구성하는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편성이다. 자산조사 없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현금을 지급한다. 둘째, 무조건성이다. 근로 등의 조건이나 심사 없이 지급한다. 셋째, 개별성이다. 가구가 아니라 개인에게 지급한다. 넷째, 정기성이다. 매달 지속적으로 지급한다. 다섯째, 충분성이다. 기본 생활이 가능할 만큼 지급한다. 이런 특성을 모두 갖출 때라야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이 허락된다. 기본소득제도 주창자들에 의하면, 여기서 하나라도 빠질 경우 기본소득이 아니다.

지자체가 지급한 소득하위 50% 대상의 선별적 재난지원금은 기본소득의 보편성 원칙부터 어긋난다.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다. 그렇다면 경기도의 재난기본소득은 정명일까? 지난 3월 24일 이 지사는 “코로나19 경제위기는 기본소득 필요성을 절감하고 도입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하며 경기도민 모두에게 10만 원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기본소득인지 따져보자. 경기도 재난지원금은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원칙에는 부합한다. 하지만 정기성과 충분성 원칙에 어긋난다. 재난 대응을 위한 일시적 현금 지급은 매달 지속적으로 지급된다는 정기성 원칙에 위배되고, 기초생계가 가능할 만큼 충분한 금액(월 70만 원 정도)이 지급돼야 한다는 충분성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지사의 재난기본소득은 정명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라 재난지원금을 택했다. 게다가 현금 지원이 기본소득제도의 실험적 도입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애쓴 노력도 엿보인다. 실제로 정부의 재난지원금은 기본소득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70%에게 지급하므로 ‘선별적 보편성’은 인정되지만 가구 단위의 지급이므로 개별성 원칙에 어긋난다. 무조건성과 일회적 충분성에는 부합하지만 정기성은 없다. 그래서 정부는 이를 재난지원금이라고 명명했다. 정명이다.

기본소득제도에 의하면 국민 모두에게 매달 70만 원 현금을 지급해야 한다. 연간 1인당 800만 원만 계산해도 400조 원 이상 소요된다. 올해 중앙정부 재정이 512조 원임을 감안할 때, 추가로 이 재원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기존 복지국가 제도를 통폐합할 수밖에 없게 되고, 문재인 케어와 노인장기요양 등 사회서비스가 축소 또는 일부 민영화될 개연성이 크다.

기본소득 주창자들은 효과와 효율을 이유로 기존 복지국가를 대체하는 기본소득제도를 요구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편적 복지국가는 지난 50년에 걸쳐 상황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며 발전해왔고, 장차 4차 산업혁명 등 토대의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제도 발전을 이어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능력 배양의 기회를 공정하게 보장하는 보편적·적극적 복지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사회서비스 중심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갖는 본질적 장점이다. 그래서 선진 복지국가들은 기본소득제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장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현금 포퓰리즘 논란을 불러올 기본소득제도가 복지의 외피를 쓴 채 정명(正名)이 아닌 방식으로 번져나가는 것은 심히 유감스럽고 우려할 만한 일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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