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미국 유학 시절 품었던 의문 하나는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99년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원 과정에서 같이 공부하던 베이징대 출신 중국 유학생들과 수업시간에 논쟁이 붙었다. 필자가 대표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러시아와 중국을 거론하자, 러시아 유학생은 인정했는데 중국 유학생들은 반발했다. 중국 유학생들은 대표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캐나다를 꼽았다. 그 세미나 수업을 지도하던 교수는 미소만 짓고 있었고, 교실 안의 다수였던 미국 학생들은 캐나다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고 키득거렸다. 중국 유학생들은 왜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했을까?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감추려고 했을까?
다니엘 벨은 1960년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했다. 여기서 종말을 맞게 될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를 기초로 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무릎을 꿇었다. 필자가 최근 2, 3년간 방문한 러시아 베트남 중국에서는 짧은 체류기간이기는 했지만, 국가계획경제 시스템을 경험할 수 없었다. 이 세 나라는 외부 영향이 아니라 스스로 사회주의 체제를 택한, 레닌 호찌민 마오쩌둥이라는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 지도자를 배출한, 사회주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다. 경제는 그렇지만, 사회주의 이념은 아직 도처에 살아 있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지난해 9월 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 때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당당히 밝혔으며,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올해 2월 한 정당의 창당 발기인 대회에서 강연 도중 어떻게 ‘조국 교수가 사회주의자를 자처할 수 있는가’라며 울컥했다고 한다. 조국과 진중권급의 오피니언 리더를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필자도 한마디 거들자면 이렇다. ‘당신들의 사회주의는 책 속에만 있습니다’. 대학생 때 책을 통해 알게 된 사회주의는 노동자 즉 일하는 이가 주인이 되는 사회였다. 현재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런 국가인가?
2000년대 후반께 중국에 거주하며 사업하는 영국인 친구의 집에 일주일간 머문 적이 있다. 그의 중국인 사업 파트너의 저녁 초대로 그 중국인의 저택에 방문했다. 군 장성 출신인 그 파트너의 저택과 부지(敷地)는 현재 필자의 직장인 동의대 캠퍼스보다 넓었다. 이런 규모의 저택을 어떻게 지었냐고 영국인 친구에게 물었더니, 군 장성 시절 휘하 병력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 화려한 만찬장에서 생전 처음 최고급 쿠바산 시가(cigar)를 피워봤다.
자본주의에서는 부(富)가 권력을 소유하고 사회주의에서는 권력이 부(富)를 소유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유 경쟁과 효율성, 사회주의체제는 공유와 평등의 가치를 앞세우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부(富)의 카르텔과 사회주의 사회의 권력 카르텔은 그들이 앞세우는 가치를 초월한 위치에서 군림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속이 곧 사회의 존속이라고 피지배자를 세뇌한다. 이 세뇌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고통스럽지만,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한국 정치를 주도하는 정당들은 이념으로 엮어낸 진영의 울타리를 세운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 진영의 부역자로 몰아붙인다. 자신을 중도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이쪽저쪽의 부역자가 된다. 단테 ‘신곡’의 한 구절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존 에프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에 의해 각색된,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를 위해 예약되어 있다”는 협박에 시달려야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을 다시 보자. ‘도덕적 위기’를 초래한 자들은 이념과 진영 논리를 앞세워 보편적 도덕 원칙을 무너뜨리는 자들이다. 정치적 중도가 도덕적 중립은 아니다. 다가오는 선거는 스스로 정치적 중도라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보편적 도덕 원칙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할,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선거이다.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조율해 낼 수 있는 후보자들을 찾아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나의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후보가 선뜻 보이지 않는다면, 중요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순서로 제외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탐욕을 감추기 위해 진영을 내세우고 있는 자부터.
동의대 공공인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