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보다는 가난에 대한 시각과 태도가 더 중요하다. 가난은 제도를 바꾸거나 부단한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가난에 대한 시각과 태도가 그릇될 경우 제도 개혁 자체가 불가능해서다. 작가 박완서는 1975년 발표한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에서 그런 상황을 오롯이 포착했다. 봉제공장 여공인 소설의 주인공은 도금공장에 다니는 남자와 산동네 단칸 셋방에서 동거한다. 그녀는 가난이 싫어 목숨을 끊은 부모와 오빠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악착같이 살아간다. 연탄가스와 음식 냄새로 숨이 막힐 듯한 좁은 부엌을 견뎌야 한다며 스스로를 독려하는 그녀에게 동거남은 삶의 유일한 의지처다.
“난 부잣집 도련님인데, 아버지가 방학 동안 어디 가서 고생 좀 실컷 하고 오라고 무일푼으로 내쫓았어.” 그런 동거남이 가출했다 돌아와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부자들이 제 돈 갖고 무슨 짓을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자신에게 돈을 건네는 동거남을 내쫓은 주인공의 독백에는 상실감이 가득하다. 부자는 빈자를 한낱 가난 경험의 수단이나, 자신의 의지에 좌우되는 타율적 존재로 여길 뿐이어서다. 그 사회는 ‘도둑맞은 가난’을 조장한다.
이 소설이 출간된 1975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GNI)이 650달러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2019년에는 1인당 GNI가 그 50배인 3만2000달러(추산치)로 급증하는 등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됐다. 하지만 빈자에 대한 인간적 예의는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빈부 격차의 확대 탓인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경제가 성장할수록 빈자의 자리는 줄어드는 듯하다. 소설의 주인공이 분노했던 가난의 희롱을 넘어 가난을 상품화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는 게 그 증좌다.
서울시와 마포구, 경기도 고양시는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후 관광지 조성 계획을 밝혀 가난 상품화 논란에 불을 지폈다. 자하문 터널 등 주요 촬영지 4곳을 관광코스로 개발하고, 영화 속 기택(송강호 분) 가족의 반지하 주택 세트장을 복원해 체험관광시설을 만든다고 한다. 세계적 명성을 떨친 작품인 만큼 관광 효과는 클 터이다. 그러나 해당 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구경거리로 전락할 처지에 놓인다. “누군가에게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가난의 기억이 누군가에겐 상품이 되는 ‘가난 포르노’”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2015년 인천에서도 비슷한 가난 상품화 시도가 있었다. 동화작가 김중미가 인천의 가장 오래된 빈민촌인 만석동 달동네를 무대로 쓴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널리 읽히자, 관할 기초지자체가 ‘쪽방촌 체험관’을 지으려 한 것이다. “어린이 날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자녀들에게 ‘너희도 공부 못하면 이렇게 살게 된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하며 돌아다녔다. 그런 소리를 들은 마을 노인들이나 아이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참담하다”. 그 계획은 빗발치는 반대 여론에 밀려 철회됐지만, 당시 작가가 남긴 언론 인터뷰 발언은 지금도 여전히 불편하다.
‘기생충’ 관광지 역시 ‘괭이부리말’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선례는 수두룩하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의 빈민가 ‘파벨라’가 대표적이다. 이곳의 빈민가 투어는 관광 상품화된 지 오래다. 인도의 뭄바이, 남아공의 스웨토, 케냐의 키베라, 멕시코의 멕시코시티 등도 같은 부류다. 그 공통점은 가난(poor)을 관광상품화(tourism)하는 ‘푸어리즘(poorism)’이다. 지난해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한 부산 감천문화마을도 푸어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의 산토리니’나 ‘한국의 마추픽추’ 등 해외 관광명소에서 따온 별칭으로 미화한다 해도, 한국전쟁 피란민촌이라는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다. 감천문화마을의 가치는 그 정체성을 갈고 닦는 데서 빛난다.
따라서 명심해야 할 게 있다. 관광사업은 곁가지일 뿐, 본질은 어디까지나 마을 공동체 보존에 있다는 사실이다. 관광사업 또한 원주민이 마을에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혹여 관광사업에 눈이 멀어 그 본질을 외면한다면, 마을도 잃고 주민도 잃는 비극이 초래될 게 뻔하다. 비극으로 침몰하는 함정은 정체성을 흔드는 사업 욕심이 발동하는 곳에 도사리고 있다.
‘기생충’이란 제목은 역설적이다. 영화에서 보듯, 빈자는 부자에 기생하지 않는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부자와 상생을 모색할 따름이다. ‘기생충’이라 명명한 건 빈부 격차를 키우는 분배 불평등에 대한 항변적 성격이 짙다. 그래서 기생충도, 감천문화마을도 상생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도둑맞은 가난’의 낭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