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 폐렴’으로 시작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첫 환자가 나온 지 불과 두 달 뒤 전 세계 확진자는 4만5000만 명에 육박하고, 사망자는 1100명을 넘는다. 코로나19는 770여 명의 사망자를 냈던 2002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를 벌써 넘어설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전염력으로 다시 한번 세계를 팬더믹 공포에 빠뜨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3년 전 독일에서 열린 ‘뮌헨 안보 콘퍼런스’에서 “글로벌 전염병이 핵폭탄이나 기후변화보다 훨씬 더 인류에게 위험한 재앙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던 예언이 현실이 됐다.
인간의 본성일지 몰라도, 사람은 위협당하면 항상 ‘외부의 적’을 찾았다. 대중은 ‘포비아(공포증)’로 무장해 외부의 적을 만들고 비난하는 행위를 정당화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바이러스의 진원지인 중국에 대한 포비아가 널리 퍼졌다. 도시철도 내나 관광지에서 중국말이 들리면 자리를 피하거나 손가락질한다. 온라인에서는 중국인을 향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욕설을 뱉어낸다. 부산에선 “중국 이주민이 바이러스를 퍼뜨리려 일부러 자가격리를 하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헛소문까지 나돈다. 건설현장 요식업소 가사도우미 등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던 중국 국적의 노동자는 요즘 일감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고 한다. 특히 대중을 많이 상대하는 음식점 등에서의 중국인 노동자 기피 현상은 더 심하다. “중국말이 들리면 손님이 싫어한다”는 게 이유다. 심지어 혐오 대상은 중국을 넘어 동남아인으로까지 확산한다.
그러고도 우리는 아시아인 전체를 싸잡아 혐오하는 서구사회에는 억울해한다. 유럽의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쓰고 자리에 앉자 옆 승객이 다른 자리로 피했다는 한국인의 사연이나 이탈리아 호주 등 학교에서 한국계 학생의 등교를 금지했다는 소식, 한 유럽 국적기가 기내 화장실에 영어도 아닌 한국어로만 ‘승무원 전용 화장실’이라는 안내문을 붙여 불쾌감을 느꼈다는 내용의 기사에는 ‘참지 못할 인종차별’이라는 비난 댓글이 쏟아진다. “우리가 피해자인데 도매금으로 바이러스 취급을 당한다”는 분노다. ‘#JeNeSuisPasUnVirus(나는 바이러스가 아니다)’ 해시태그를 확산하며 인종차별을 멈추라고 서구사회에 주문한다.
인종차별에 대한 대항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목소리는 더 커져 그들을 더 압박해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혐오해도 되지만 혐오당하면 안 되는 걸까. 국내에 있는 중국인은 물론 중국 심지어 동남아에는 확진 판정을 받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다. 평범한 우리처럼. 그럼에도 그들을 보균자 취급하며 손가락질하는 게 정당한 일일까. 우리는 바이러스 취급을 당하면 인종차별이라고 반발하면서 그들은 싸잡아 ‘구별짓기’ 해도 되는가 말이다.
잊지 말자.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수천 명의 조선인을 학살한 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얼토당토않은 괴담이 촉발한 조선인 혐오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물론 일부 방역의 구멍은 있지만 다행히 국내 코로나19는 정부 통제 아래 잘 관리되는 형국이다. 2009년 신종 플루 때 국내 사망자는 260명이나 됐고, 2015년 메르스 때도 36명이 목숨을 잃었다. 코로나19는 확진자는 있지만, 사스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 사망자는 없다. 우리가 겨눠야 할 진정한 외부의 적은 중국인이 아닌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질병이다. 치료제를 만들고 낫게 해 사람들을 일상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중국에 인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지나친 경계를 경계하는 일,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우리가 광기가 아닌 이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 곳곳에서 증명되기 때문이다. 일시 귀국한 우한 교민을 수용할 시설이 소재한 충남 아산과 진천지역의 일부 주민이 극렬히 ‘코로나 님비’를 외쳤을 때도, ‘우리가 아산이다(We are ASAN)’ 운동을 벌였던 아산 주민의, 포비아를 이기는 따뜻한 이성을 우리는 모두 보았다.
사회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