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앞에 놓인 결핍은 불평의 대상이 아닌 극복해야 하는 무엇이다. 사랑은 때때로 뜻밖의 장소에서 다가온다. 조금의 덜컹거림과 조금의 소음. 끊임없이 사람이 오가는, 조금은 산만한 몇 평 남짓 공간. 가방에서 책 한 권을 조심스레 꺼낸다. 단어들이 부딪히며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 휘황찬란한 언어의 속삭임에 마음이 제멋대로 휘둘린다. 기쁨과 슬픔, 공감과 분노 사이 어느 지점에서 헤맨다. 견고하던 개인의 세계 속에 타인의 삶과 생각이 침투한다.
지하철에서 책을 펼치기 위해선 몇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충분한 공간. 좌석에 앉을 수 있다면 가장 좋다. 서 있는 경우, 들고나는 이들을 방해하지 않는 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 나는 지하철에서도 책 읽는 사람이라는, 한 줌의 허세가 가미되면 딱 좋다. 책을 펼치는 순간, 이질적인 풍경도 함께 펼쳐진다. 마땅히 스마트폰을 쥐고 있어야 할 손에 감히 책이라니. 이질감을 자아내는 원인은 나 자신이고, 손에 쥔 책 한 권이다.
왜 주변에 책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까 늘 불평불만 가득하던 대학 시절을 넘어, 책 만드는 일로 어찌어찌 입에 풀칠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다만 개인의 상황이 바뀌었을 뿐, 현실은 더 열악해졌다. 독서인구는 급격히 줄다 2019년에는 기어코 절반을 찍고 말았다. 두 명 중 한 명은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암울한 통계는, 그럼 책 읽는 나머지 절반은 대체 어디 있느냐는 절망으로 이어진다. 정말 두 명 중 한 명만 읽어도, 출판계가 이렇게 어렵지 않을 것만 같다.
출판계가 늘 불황이고 독서인구는 눈에 띄게 줄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는 시대이다. 문을 닫는다는 출판사와 서점, 인쇄소 소식이 연이어 들려온다. 누군가는 종이책의 종말을 예언한다. 내 직업에 대한 확신과 자긍심을, 어쩌면 정체성까지 뿌리째 흔드는 말들이다. 책보다 재미있는 게 충분히 많은데, 굳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나 역시 모르겠다. 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이런데, 사람들이 책에 관심 가져주길 바라는 건 모순이다. 하필 이런 시대에 편집자라니.
이따금 새로운 사람을 만나 명함을 내밀 때면, 부산에서도 출판사가 있었느냐는 질문이 늘 따라온다. 존재 자체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지역출판이 더욱 열악한 환경에 놓였다는 투정은 사치에 가깝다. 이러한 지표들은 이제 갓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청년의 순수한 열정을 걱정과 불안으로 물들인다. 여러모로 힘든 세대이지만, 출판사 편집자라는 직함은 삶을 더욱 고달프게 만든다. 혹여 깊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난파선에 멋도 모르고 몸을 실은 건 아닐까, 어떻게든 다시 책의 시대가 돌아올 거라며 허황된 믿음을 좇는 건 아닐까. 온갖 의문이 하루에도 수십 번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출판, 지역, 청년. 이 세 단어가 만들어내는 조합은 아무래도 암울하다. 스마트폰으로 가득한 지하철 안에서 홀로 책을 쥔 채 머뭇머뭇하는, 시대착오적인 모습처럼.
이런 복잡한 감정도 잠시, 책을 펼치자 활자 속으로 빠져든다. 우연한 마주침으로 시작된 인연은 한 청년을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느릿느릿 가던 시간에 속도가 붙는다. 시간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긴다. 세상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현실은 망각된다. 사랑의 증상이다. 이것저것 따지기보다 타오르는 감정에 몸을 맡긴다. 논리와 이성이 사라진다. 텅 빈 머릿속에 감성이 스민다. 사랑은 불안의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이 모든 게 극복 대상이다.
사랑이 향하는 곳은 꼭 사람일 필요는 없으며, 누군가에겐 책이 그 대상이다. 스마트폰으로 대동단결된 이 평화로운 공간 속, 내 손에 쥐어진 종이 뭉치가 혼란을 야기하는 원인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가 지하철에서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누가 뭐래도 나는 책을 펼칠 것이고, 다른 누군가가 지하철에서 펼칠 책을 만들 것이다. 거창한 사명감은 없다. 그저 한 존재를 위한 사랑이다. 내가 사랑하는 걸 지키려는 몸부림이다. 불안과 결핍을 재료 삼아, 한 존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보겠다는 의지다. 사랑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늘 사랑에 빠지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존재 아닌가. 무엇보다 내가 사랑한다는데, 뭐 어때서.
호밀밭 출판사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