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고향인 부산에 돌아올 때면, 가장 좋아하는 두 종류 시간이 있었다. 하나는 집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함께 마트에 가는 일이었다. 고향에 내려오더라도, 친구를 만난다든지, 다른 일을 하러 쏘다니기보다는 거의 그 두 가지 시간을 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올 정도로 자주 부산에 왔었는데, 주로 하는 일은 어머니와 마트에 들러 맛있는 것들을 잔뜩 산 다음, 밤새도록 영화를 보고, 늦게 읽어나 책을 읽는 일이었다.

그림 서상균

얼마 전, 아내와 같이 마트에 갔는데 그 시절 기분이랄 게 조금 생각났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왜 그리도 마트를 좋아했는지는 약간 의문이기도 하다. 마트 중에서도 내가 유독 좋아하는 마트가 있었는데, 그냥 식료품만 파는 어두침침한 마트보다는, 조명이 무척 밝고 화려하여서 밤낮을 알 수 없고,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모든 공간이 가득 차 있는 듯하고, 우울한 기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그 밝으면서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편안한 자유의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사실, 마트에 가서도 특별히 사는 건 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초코우유나 프링글스를 잔뜩 사는 정도였고, 대단한 소비랄 것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건 그 특유의 밝은 분위기, 자본과 소비가 만들어내는 유사 천국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나 싶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라는 책을 출간했지만, 사실 ‘마트에도 절망은 없다’.

그곳은 밝고 화려하며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반기고, 푸드코트에서 저렴하고 맛있는 저녁이나 먹고 커피우유나 사 오면 그만인 그런 곳이었다. 큰 마트는 모두들 약간은 놀러 나온 기분으로 들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짜증스러운 비명 소리나, 슬픔의 흔적, 우울이나 절망의 분위기 같은 것은 느끼기 힘들다. 내게는 아마 그런 시간이 필요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 내가 살던 골목은 그런 ‘마트의 분위기’와는 정반대에 가까웠다.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골목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대부분이 낡은 집이었고, 학생들이 살던 원룸들도 얇은 판으로 칸막이 지어진 허름한 공간들이었다. 그 골목 중간 어디쯤 자리 잡고 있었던 나의 단층짜리 원룸에서 나는 그저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고요함을 사랑하는 삶을 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서울에서 혼자 마트나 백화점, 쇼핑몰에 갈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 곳에 출입하게 된 건 한참 뒤, 대학을 졸업하고, 약간의 돈을 벌고, 새 옷을 입을 일들이 생기고, 낡은 자동차나마 얻게 되었을 때였다. 대학 시절 나는 ‘자본주의의 밝은 면’과는 일반적으로 아주 멀찍이 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나마 부산에 오면 어머니와 마트에 가서 그런 측면들을 잠깐이나마, 어쩌면 피상적으로 누렸던 게 아닐까 싶다.

요즘에도 가장 간단하게 기분 전환을 하는 방법은 쇼핑몰에 가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데리고 가기 워낙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아휴게실도 잘 되어 있고, 아이에게 무엇을 먹이기도 좋고, 안전하고, 놀기도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쇼핑몰에 가서 ‘좋은 기분’을 얻어올 때면, 뭐랄까, 다소 소비적이거나 금방 사라지는 종류의 ‘찰나의 기분’ 같은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차라리 그보다는 바다라도 잠시 보거나, 잠깐이라도 고요한 곳을 거닐거나, 좋아하는 공연이라도 볼 때면, 그런 시간은 삶을 지켜주는 어떤 재료가 된다고 느껴지곤 한다. 삶이라는 게 아무래도 마트라든지, 소비의 기분이라든지, 자본주의의 분위기라는 것도 필요할 테지만, 그런 것은 너무 쉽게 사라지는 위안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은 기분들보다도 삶을 더 깊이 지켜줄 수 있는 경험들, 잠깐의 기쁨을 소비하는 것보다도 삶을 더 이루어내는 시간들, 기분 좋고 사라지는 일들보다도 삶 전체를 받쳐줄 수 있는 어떤 일들에 관해 생각해본다. 그런 경험들, 시간들, 일들을 삶 속에 어떻게 자리 잡게 할 것인가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런 것들이 있는 삶으로 다가가고 있는 와중이라고, 자주 믿고 싶어진다.

문화평론가·‘분노사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