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가 판치다 못해 가짜와 진짜의 구별 자체가 모호해진 소위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를 맞아 우리의 판단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탄핵 정국 때만 해도 부정한 위정자와 정의로운 주권자인 국민이 확실히 구별되는 듯 보였으나 이제 광화문과 서초동 촛불시위가 서로 수를 다투는 상황에 직면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좀처럼 힘들어졌다. 물론 이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진리와 정의는 늘 실종될 위기에 몰려있다. 다만 가끔씩 절대악이 등장하여 진리와 정의의 가치를 확인시켜주곤 한다.

소위 조국 사태는 ‘탈진실’ 시대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매체마다 진영마다 완전히 다른 얘기들을 한다. 혹자는 도덕적 위선을 말하고, 혹자는 그래도 실정법 위반은 아니라고, 혹은 정치적 음모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와중에 혼란을 빚는 것이 바로 판단의 서로 다른 기준들이다. 과연 이 사태는 도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사법적, 혹은 정치적, 아니면 더 나아가 역사적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물론 왕도는 없다. 각 기준마다 고유한 장단점이 있을 뿐이다.

먼저 도덕적 판단과 사법적 판단은 서로 다른 점도, 공통점도 있다. 설령 조국 전 장관이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법적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도덕은 법보다 훨씬 요구사항이 많다. 그렇지만 양자는 개인 책임을 묻는다는 점에서 일치된다. 재판관은 당사자의 진술을 직접 청취하며 온갖 변명에 흔들림 없이 구체적인 책임을 따져 묻는다. 정의를 구현하려면 좌고우면해서는 안 된다. 물론 절대적인 판단인 만큼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지만 재판관은 아무리 신중하더라도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판결을 내려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도덕적, 사법적 판단은 정치적, 역사적 판단과는 결이 다르다. 조국 전 장관의 도덕성과 법 위반 여부가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설령 성인군자라 해도 반드시 정치적으로 옳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조국은 더는 조국 개인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정치적 판단은 역사적 판단과 통한다.

역사가는 개인 행위를 개인의 책임으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개개의 세부적 사실은 시대의 진실을 말해줄 수 없다. 진실은 해석의 문제이며 정치적 방향성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재판관처럼 어느 시점에서 판단을 중단할 필요가 없다. 다각도로 수집된 사실을 꼼꼼하게 정리하는 역사가는 자신이 도달한 잠정적 결론이 결코 진실과 등치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다시 써 내려간다. 만약 한 시대와 정치적 개인을 사법적 잣대로만 판단하려 든다면 결국 남는 것은 시대의 요구에 눈을 감는 외골수의 정의이다. 상식선을 벗어난 죄악을 응징하는 경우가 아닌 한, 그러한 판단은 오히려 불의에 가깝다.

감히 예단해본다면 작금의 현실은 기득권 세력과 개혁 세력 간의 오랜 적대를 판가름하는 한판 승부로 역사책에 기록될 공산이 크다. 확실히 기득권 세력은 여러모로 정당성을 상실했고 개혁 세력의 절실함은 정점에 달해있다. 물론 이 싸움이 어느 편의 최종 승리로 귀결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역사적 심각성에 비한다면 경미한 부분까지 실정법 위반을 따지는 일은 실로 의심스럽다. 아니 사법적 판결마저도 이 정체절명 순간에 승패를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 정치적 결단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역사적이다.

서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이 역사적 기로에서 과연 진리와 정의가 승리할 수 있을까? 실은 무척 회의적이다. 이 나라 기득권 세력이 쉽사리 권력을 포기할 만큼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만약 진리와 정의를 진정으로 갈망하는 세력이 다수라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진리와 정의로부터 이미 너무 멀어진 것 같다. 기성 언론이 지나치게 부각하는 소위 586세대의 타락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옛 운동권 경력을 훈장처럼 내세우지 않는 한 그들을 모욕하는 것은 진리와 정의를 우습게 여기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낼 뿐이다. 진리와 정의가 실종된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것이 바로 기득권층이 퍼뜨린 빈약한 현실 논리와 이를 기술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법 권력이다.

역사적 판단은 이러한 막막한 현실에서 슬기롭게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불편부당한 진리와 정의를 직접 제공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일방적 진리 주장과 그로 인해 초래되는 불의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진리는 결국 하나일 수 있지만 그것에 도달하는 길은 결코 하나가 아니며 누구도 왕도를 제시할 수 없다. 겨우 개미 뒷다리를 붙들고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강변하는 법조인들과 이들의 힘에 의존하는 낡은 세력에게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폭넓은 역사적 감각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