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집을 나와 L선생에게 방금 먹은 국수 맛에 대해 품평을 청하자 그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렇듯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나는 제주도에서 춘자싸롱 국시 말고는 국시로 안 보네.”
소설가 성석제의 에세이 ‘춘자싸롱 멸치국수’ 한 대목이다. 십수 년 전 이 에세이를 읽자마자 제주도 표선면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춘자싸롱’이란 국숫집은 없었지만, 양은냄비에 춘자 씨가 말아주는 국수를 파는 집은 분명히 있었다. 그때의 감격이란!. 벅찬 심정으로 국수 한 냄비를 맛있게 비운 나는 속으로 이렇게 지껄였다. “괜히 바다 건너 멀리 왔네. 그냥 강 건너 대동할매국수나 먹으러 갈 걸….”
대동할매국수, 더 무슨 수식어가 필요할까 싶다. 부산 김해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국수 한가락 한다는 사람 치고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국숫집이다. 1959년 김해 대동면 초정리에 터를 잡은 이래, 가늘고 길어 장수를 기원하던 국수 가닥처럼 60년 세월을 꼬장꼬장 버텨왔다. 대동할매국수는 잔치국수와 다르고 멸치국수와도 다른, 그저 ‘대동할매국수’다.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에 홀로 된 ‘여인’이 ‘할매’가 되는 동안 대동할매국수는 그렇게 ‘유일한 것’이 되었고 또한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유독 ‘할매’가 붙은 음식점이 많다. 많은 사람이 이 명칭에서 고향의 맛을 기대하고 푸근함을 느낀다. 하나, 그 세월을 더듬어 보면 참 서글픈 명칭이다. 한국전쟁과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가장을 잃고 홀로 된 여인이 유난히 많았다. 기구한 운명이건만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더러 행상을 하고, 더러 좌판을 깔고 음식장사를 했다. 상호 따위 가질 여유도 겨를도 없었다. 꽃다운 청춘 다 보내고 주름이 깊어질 즈음에야 남들이 붙여준 이름 하나 얻었으니, 바로 ‘할매집’이다. 대동할매국수 주동금 할매의 인생 역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열여덟에 부산 대신동으로 시집가 살다가 스물여덟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가 됐다. 살길이 막막해 딸을 데리고 친정 안막마을로 돌아왔다. 친정에서 안막장터 옆에 방 한 칸 딸린 집을 구해줬다. 큰 밑천 없어도 시작할 수 있어 택한 것이 장날 국수 장사다. 경험 없는 아낙의 국숫집이 잘될 턱이 없었다. 장꾼들은 죄다 근처 돼지국밥집으로 몰려갔다.
딴에는 잘 만든다고 멸치 대가리랑 내장을 발라내고 국물을 우렸는데 어느 날 손님이 그러더란다. “아까운 메르치 똥은 와 버리요.” 이때부터 대동할매국수 특유의 ‘멸치곰국’이 시작된다. 누리끼리한 색에 진한 감칠맛과 멸치 내장 특유의 쌉싸래한 맛이 어우러진 육수가 토박이 입맛을 사로잡았다. 돼지국밥처럼, 투박함은 익숙함으로, 멸치 특유의 감칠맛은 각별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육수가 워낙 진하니 제법 굵은 국수를 말아도 맛이 흐려지지 않는다. 지금이야 기계로 건조한 국수를 쓰지만, 바닷바람에 말려 짭조름하고 쫄깃한 구포국수와 만났을 초기엔 그 맛이 어땠을지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성석제 소설가와 L선생께는 죄송하지만, 멸치국수는 역시 ‘춘자싸롱’보다 ‘할매국수’가 한 수 위다.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