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세계 중심으로 여겼던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자 아시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에 놀란 중국의 위원(魏源)은 역사지리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썼다. 서양에 이기려면 서양을 알고 배워야 한다는 관점에서 세계 각국의 지리, 역사, 국력 현황을 서술한 책이다. 일본에도 위기감이 번졌다. 처음에는 왕을 중심으로 외세를 물리치자는 존왕양이론이 지배했지만, 몇 차례 서양과 대결해 보고는 재빨리 개화·근대화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집권하던 조선은 단호한 쇄국정책으로 굳세게 외세에 항거하고 있었다.

조선 말, 북촌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유길준(兪吉濬)은 외할아버지의 소개로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해국도지’를 접한 유길준은 큰 충격에 빠졌다. 중화는 더 이상 세계 중심이 아니다. 변한 바깥세상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입신출세를 위해 2000년 전 공자의 말씀만 외우고 있으니. 유길준은 “과문이라는 것은 국가를 병들게 하는 근본이자 인민을 학대하는 기구이니 과문이 존재하면 백해가 있을 뿐…”이라며 과거제를 비판하고 과감히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마침 고종은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보냈다. 유길준은 박규수와 민영익의 추천을 받아 수행원으로 4개월간 일본을 시찰했다. 유길준은 변한 일본을 제대로 알려면 언어부터 습득해야 한다고 생각해 일본에 남아 공부하기로 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 일본 유학생이 되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게이오의숙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서양사정(西洋事情)’의 저자로 근대 일본의 정신적 기초를 구축한 사상가, 교육가로 추앙받고 있던 후쿠자와와 인연을 맺는다.

1년 후 귀국한 유길준은 1883년, 이번에는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다. 그는 미국 사회를 알기 위해 영어를 배우겠다며 미국에 남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그는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미국 학교에 들어갔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귀국 명령이 내려졌고, 그는 1895년 대서양을 거쳐 유럽 동남아시아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갑신정변 연루자들은 모두 극형에 처해졌고, 유길준도 소환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우포도대장 한규설이 유길준을 그의 집에 유폐시켜 겨우 피살을 면할 수 있었다. 7년간 가택연금 생활 동안 유길준은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그는 정부에 들어가 갑오·을미개혁에 참여했다. 1895년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서유견문’을 1000부 찍어, 국내 주요 인사에게 무료 배포했다.

‘서유견문’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서양 소개서가 아니다. 근대화의 골격이 담긴 책이었다. 그는 백성의 눈이 트이기 바라며 당시로는 혁신적인 국한문 혼용체로 발간했다. 그러나 ‘서유견문’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노론계 위정척사파뿐 아니라 영남 남인도 그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며 탄핵 상소를 연일 올렸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아관파천하면서 유길준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일본에 망명했고 ‘서유견문’도 금서가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은 당시 15만 부, 해적판까지 포함하면 20만~25만 부 팔렸다. 그는 이 수입으로 게이오 대학을 세우고 신문사를 설립해 근대 시민의식을 정립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의 활동에 힘을 실어준 것은 ‘깨어 있는 민중’이었다. 많은 일본인이 책을 사보았고, 이에 힘입어 그는 계속 글을 쓰며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그가 근대 시민정신에 대해 쓴 ‘학문의 권유’는 누계로 3000만 부가 팔렸다. 반면 유길준은 역경 속에 체득한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박한 심정으로 썼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비난과 무관심이었다. 그는 정부에 들어가 단발령 등 개혁을 밀어붙였지만 반대 운동이 일자 고종마저 번복했다. 민중의 뒷받침 없는 정부 개혁은 오래 못 간다. 세월이 흘러 1904년 귀국한 그는 을사조약에 반대하고 국민을 깨우치는 교육과 저술활동에 힘썼지만, 이미 국운은 기울었다. 일제의 조선 병탄 이후 일제가 귀족 작위를 내렸으나 그는 거절했다.

니혼대학 상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