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도 2주밖에 남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려온 한 해를 되돌아 보는 시기인 만큼 개인이든, 조직이든 나름대로 소회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다 한 해를 특징 짓는 여러 기관 단체의 조사 결과도 이맘때면 잇따른다. 그해의 트렌드이자, 전년과는 다른 세태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지표인 셈이다. 이런 새로운 트렌드는 때로는 미래 소비자를 겨냥한 다양한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근년 들어 연말을 장식하는 한 해 트렌드 등 세태 모습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게 많다.
어찌 보면 현실이 날로 팍팍해지니 당연한 일이다. 저마다 별 이룬 것도 없이 세월을 보냈다는 아쉬움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 소회나 아쉬움이 해가 갈수록 더 심해져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중 대표적인 게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사회적 현상이다. 심화하는 무한경쟁 시대에 제 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세태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길게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잠식해온 흐름이다. 하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 풍조가 더욱 확산하면서 올 들어서는 더욱 고착화한 듯하다.
지난달 말 통계청이 전국 13세 이상 3만7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2019 사회조사 결과’는 각자도생이란 한마디로 요약된다. ‘우리 사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50.9%로 ‘믿을 수 없다’는 응답자(49.1%)를 간신히 앞섰다. 이런 사회적 불신감은 계층 이동 기대감 하락으로 이어졌다. 계층 이동 가능성이 높다는 응답자는 28.9%로, 10년 전 조사(48.3%)에 비해 20%포인트 가까이 떨어졌다. 낙심하거나 우울할 때 이야기 상대나, 급전을 빌려야 할 경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도 과거보다 크게 줄었다.
한 취업 포탈이 최근 성인 96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올해의 사자성어 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체적으로 1위는 ‘전전반측(輾轉反側·걱정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함)’이었고, 2위가 ‘노이무공(勞而無功·애만 쓰고 보람이 없다)’, 3위가 각자도생이었다. 전전반측은 구직자 중, 노이무공은 자영업자 중, 각자도생은 직장인 중 각각 1위였다. 밤잠을 못 이루는 구직자나, 헛수고만 하는 상당수 자영업자도 그렇지만 번듯한 직장을 가진 이들마저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순위나 표현만 다를 뿐 사실상 뚜렷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기는 매한가지다.
각자도생은 모래알 사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아무 데도 기댈 게 없으니 제 한 몸 건사하기 바쁘다. 주변을 돌아보기는커녕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만 한다. 공동체라는 개념은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다. 이는 세대 간, 또는 세대 내 갈등과 경쟁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일자리를 둘러싼 20, 30대와 노령 세대 간 갈등은 이미 표면화됐다. 중간에 낀 40대는 한창 일할 나이에 벌써부터 퇴직을 걱정하는 세상이 됐다며 아우성이다.
교수신문이 그제 선정해 발표한 올해의 사자성어 ‘공명지조(共命之鳥)’도 같은 맥락이다. ‘공명조’는 하나의 몸에 머리가 두 개인 상상 속의 새로, 한쪽 머리가 죽으면 다른 머리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함께 죽는다는 걸 모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꼬집은 셈이다. 이 또한 각자도생이 초래한 결과와 비슷한 의미다. 어쩔 수 없이 각자도생의 벼랑 끝 삶에 내몰렸지만, 종국에는 공명조와 같은 파국을 맞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각자도생이란 사자성어는 조선 시대 국운이 위기에 달했을 때마다 등장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난리통을 비롯해 조선 후기 초근목피로 백성이 고통을 받던 때였다. 도탄에 빠진 나라를 책임져야 할 조정은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었고,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백성은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렸다. 물론 오늘의 상황을 당시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차이야 어떻든, 갈등과 절망을 보듬어야 할 통합과 희망의 정치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별반 다를 바 없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공명지조’의 교훈은 이런 실망감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비단 교수사회만 가진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해법에 대한 고민은커녕 사생결단식 극한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설사 어느 한쪽이 이긴다 한들 결국은 공멸임을 모른 채 각자도생의 길로 치닫고 있다. 아무리 힘들었다고 해도 누구나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세밑이다. 그 마무리는 새해를 향한 희망을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를 보며 희망을 노래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래저래 우울하기 짝이 없는 세밑 풍경이다.
논설실장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