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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칼럼] 내심(內心)의 소리 듣는 시간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11-28 19:32:21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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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초겨울로 들어선 느낌이다. 멀리서 강설의 소식도 들려온다. 주변의 나무들은 낱낱의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섰다. 산은 웅크렸다. 들판은 비었다. 만물의 볼륨이 낮아지고 있다.
   
그림 서상균
모과 몇 알을 얻어서 넓고 큰 그릇에 놓았더니 빈방에 향기가 햇빛처럼 내린다. 향기가 따뜻하다니! 이 겨울의 시간에 가만히 앉는다. 병마개를 채운 듯이 나를 채우고서. 그러나 부동(不動)은 참 어렵다. 몸도 마음도 떠다니니 말이다.

“구름이 흘러 다녀도 하늘은 움직임이 없고, 배가 나아갈 뿐 강둑은 옮겨가지 않네.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서 환희와 슬픔이 생겨나리오.” 이 선시는 편양선사가 지은 것이다. 편양선사는 조선 중기의 스님으로 나이 열한 살에 출가해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에는 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름이 골짜기에서 생겨나고, 또 뭉치고 흩어지며 이동해 산등성이를 넘어 멀리 가더라도 하늘은 변한없이 그대로요, 배가 물을 따라 가더라도 양쪽의 강가 둑은 제자리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본래 고요하고 맑은 성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니, 기뻐하고 우는 일은 구름과 배의 일에 다름 아니라는 뜻이다. 읽어 그 뜻을 헤아릴수록 일품의 시다.

요즘엔 ‘낡은 옷을 벗어라’라는 책을 읽고 있다. 법정 스님 원적 10주기 추모집인 이 책은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불교신문에 게재한 스님의 원고 68편을 모은 것이다. 스님은 이 시기에 불교신문 주필과 논설위원의 일을 하시며 글을 지면에 실었는데, 법정 스님이라는 법명 외에도 ‘소소산인’ ‘청안’ 등의 필명을 사용하셨다고 한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셨으니 세속 나이로 삼십대 초반부터 사십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쓴 글들이다.

그때그때에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을 적은 글도 수록되어 있지만, 불교계를 향해서 한 고언도 적지 않다. 승가정신의 회복을 바라면서 승가의 정신은 회의(會議)에 근거를 두어야 하고, 이견이 있을 때에는 “건전하고 공정한 판단을 내걸 수 있는 중지(衆智)”에 물어야 하며, 배타적인 태도를 버리고 공존의 윤리를 찾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러한 말씀은 우리 시대에도 새겨들어야 할 것으로 이해됐다.

또한 대중성을 띤 역경(譯經)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경전을 번역하되 시대의 감각에 맞아야 한다는 당부였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회의 풍속과 사유 방법을 혈맥처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양자강의 줄기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닌 중국의 역경 사업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유창한 번역, 진제(眞諦)의 정밀함, 현장(玄奘)의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대로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실천한 분이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라고 강조했다. 명성이 알려지자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거처를 마련해 살면서 홀로 밭을 일구며 수행했다. 2010년 3월 11일에 원적에 들면서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며,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씀을 남겼다.

나는 마음이 산란할 때에 스님의 책들을 읽고, 또 스님의 법문을 듣는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에도 스님의 생전 육성 법문을 유튜브 등을 통해서 듣는다. 정갈하고 염결하게 사셨던 스님의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나는 스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잠시나마 가라앉히려고 애쓴다.

이번에 출간된 책에서 스님의 글들을 읽으니 직접 지으신 시도 몇 편 실려 있다. ‘정물(靜物)-거리(距離)’라는 시는 이러하다. ‘한 쟁반 위에/ 한 사과 알의 빛을/ 이만치서 바라보다/ 날 저물고// 이제/ 과일이란/ 맛보다도/ 바라보는/ 그리움// 은하(銀河) 건너 별을/ 두고 살듯…// ―너무 가까이 서지 맙시다/ ―너무 멀리도 서지 맙시다’

붉게 잘 익은 사과 한 알의 그 채색을 가만하게 바라보신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 빛깔에 마음을 두었지만, 또 그 맛에 마음을 두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그 마음의 거리를 즐기게 되었다는 말씀일 테다. 그리고 그 거리에서 생겨나는 마음을 “은하 건너 별을/ 두고 살듯” 하는 것에 빗대었다. 들끓음이 사라진 마음일 것이요, 우주적인 마음을 일컫는 것일 테다. 너무 가까이에도 멀리에도 서지 않는 그 마음에서 고요와 적정이 생겨난다는 뜻일 테다. 그러니 이 마음은 편양선사가 지은 선시에서 언급한 하늘의 마음이요, 강둑의 마음이요, 한 물건 그 자체일 것이다.

법정 스님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번에 발간된 책에서도 스님은 이렇게 쓰셨다. “가장 깊숙한 데서 나직이 들려오는 ‘내심의 소리’는 곧 우주질서의 하모니이다. 먼 강물 소리 같은. 해서 구도자들은 무성처(無聲處)인 ‘아란야’를 찾아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처럼 관광의 대상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심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거기 솔바람 소리와 시냇물 여음(餘音) 그리고 숲속에 깃드는 새소리는 차라리 내심에로의 통로인 것이다.”

   
아란야는 고요한 수행처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 아란야는 우리 마음의 고요함까지를 포괄하는 의미가 있다. 한 해가 지나가는 때이고, 또 곧 연말이 되면 송년의 모임들을 잦게 갖게 되겠지만 가끔은 가만히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찾아볼 일이다.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진짜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했다. 내면을 불타는 화로와 같게 하지 않아야 한다. 가쁘게 내고 쉬는 호흡을 차분하게 하고, 얽힌 생각을 간소하게 하면 내면으로 향하는 이 통로가 보인다. 마치 바람이 없는 연못에 물결이 쉬듯이 하면 내심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한 알의 노란 모과에서 향기가 흘러나오듯 우리의 내면으로부터도 따뜻한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올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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