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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구한말 변화 거스른 권력자의 위선 /이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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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11-06 19:20:58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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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격변기, 촉망받던 젊은이 8명이 민영익의 사저인 죽동궁에 모여 국가 장래를 논했다. 민영익을 필두로 김옥균 홍영식 어윤중 등 이들 ‘죽동팔학사’는 개화를 주도할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개화에 관심을 가진 세도가 자제 중 단연 으뜸은 민영익이었다. 민비 오빠의 양자로 지명돼 민씨 권문을 이을 인물로 민비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왕실을 움직일 권력 실세인 만큼 언젠가 그가 조선의 개화를 주도하리라고 기대되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를 돌아보는,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를 일주할 기회가 민영익에게 주어진 것이다. 조선이 개혁·개방할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미국 공사 푸트가 내한했다. 고종은 답례로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키로 했다. 정사에 민영익, 부사에 홍영식, 종사관에 서광범 그리고 유길준, 퍼시벌 로웰 등 11명이 보빙사로 뽑혔다. 특히 대표 사절은 학식도 신분도 높은 젊은 정부 요직자들로, 민영익은 조선 국왕의 처조카로 23세, 홍영식은 영의정의 아들로 28세, 서광범은 이조참판의 아들로 23세로 모두 과거급제자로서 일본 등지 해외 경험도 있었다.

화려한 한국사절단에 주목한 미국은 아낌없이 최신 문물을 보여주려 했다. 1883년 7월 인천을 떠난 사절단은 일본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뒤,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DC에 갔다. 40일간 세계박람회, 철공소, 방직공장, 시범농장, 의약제조회사, 병원, 전기회사, 철도회사, 소방서, 해군연병장, 육군사관학교 등을 견학했다. 뉴욕에서는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을 접견했다. 미 대통령은 내친김에 유럽까지 둘러보라고 자신의 특별전용선박을 내주었다. 홍영식 일행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먼저 귀국하고 민영익은 서광범과 변수와 같이 유럽탐방 길에 올랐다.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민영익은 파리와 런던, 이탈리아 로마를 보고 이집트 카이로로 갔다. 이들은 인도, 세일론, 싱가포르, 홍콩,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884년 5월 인천에 도착했다. 개화파 인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민영익에 대해 푸트 공사는 “그와 홍영식은 머지않아 개화당의 중견 지도자가 될 것이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런데 조선의 개화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몇 가지 이상 징후가 있었다. 미국 언론은 한국 사절단이 뉴욕 마천루 등 광경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을 의아해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감정을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 유럽 순방 때 서광범은 안내자 포크 소위에게 민영익은 보수 세력에 가담할 우려가 크다고 언질을 주었다. 세계 각국 최신 정보를 익히느라 바빠야 할 때, 민영익은 선실에서 묵묵히 유교 경전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옥균 홍영식 등은 민영익이 크게 변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개화에 미온적이라는 것을 실제로 알게 됐다. 더는 같은 길을 걷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거사를 모의했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홍영식 주관하에 열린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수구파를 제거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급진 개화파가 민씨 일파를 제거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폐지하고, 문벌 폐지 등 봉건 신분제를 청산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삼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민영익은 개화파 옛 동지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가족까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홍영식은 나이 30에 살해되고 그의 아버지는 홍영식의 외동아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망명한 김옥균은 자객을 보내 살해하고 시신마저 갖고 와 부관참시했다. 서광범도 오랜 기간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민영익, 그는 성리학의 권위 속에 숨어 세상의 변화를 외면했다. 구질서의 기득권을 그대로 놔둔 채,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것은 위선이다. 또 어짐(仁)과 의로움(義)를 표방한 유학자가 옛 친우들을 잔혹하게 죽여 보복한 것도 위선일 것이다. 권력의 실세였던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대의를 내세웠지만 결국 자신과 종친의 이익을 우선했던 것이다.

니혼대학 상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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