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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허공을 잡다 /김정화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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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11-03 19:06:22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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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 인생이 허공에 걸렸다. 무명 바지저고리에 푸른 갑사 전복을 입고 머리에 고깔을 쓴 줄꾼이 오름줄을 탄다. 겅중겅중 내딛는 걸음 따라 축축 허공 줄이 늘어나는데 자칫 헛발을 짚으면 천길 벼랑 끝이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여 오금이 굳는다. 국립부산국악원 야외마당에 한바탕 신명놀음이 펼쳐졌다.

줄을 타는 광대를 어름사니라고 한다. 얼음 위를 걷듯이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는 줄꾼을 이르지만, 신의 경지에 도달할 만큼 재주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깊은 뜻도 담겼다. 반대편 작수대까지 도착한 어름사니가 매호씨라 불리는 줄 아래 어릿광대와 재치 있는 입담을 펼쳐낸다.

“여보게, 매호씨. 내가 저기까지 외줄을 타고 건너 가보는디, 천리가 지척이요 지척이 천리려니 참으로 아득허다.”

“얼씨구.”

재담을 나누는 매호씨 역시 추임새를 멋들어지게 받아치며 관중 흥을 돋운다. 3m 외줄 위에서 목숨을 받쳐줄 것이라고는 쥘부채 하나뿐. 마치 제갈량이 백우선을 들고 삼군을 지휘하듯 부채만으로 허공을 잡는다. 쉴 새 없이 펴고 접으며 바람을 맞고 중심을 세운다. 떨어질 듯 말 듯 사시나무떨기를 하더니 물결이 흘러가듯 돛배가 움직이듯 줄을 건너간다.

구경꾼의 박수갈채에 여유도 늘었다. 이번에는 ‘떡쿵’ 하는 장단 신호를 넣고 양반의 팔자걸음과 뾰족구두를 신은 현대 여성의 회똑 걸음을 흉내 낸다. 박수가 적으면 내려오겠다는 강짜에 남사당패의 풍물 장단이 소리를 더한다. 두 발을 뒤로 훑다가 코차기에 이어 가랑이 사이로 줄을 타며 솟구치는 허궁잽이가 시작된다.

‘줄을 타는 그 모습 바람 탄 제비 같구나’라는 시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이때쯤이면 매호씨의 “그나저나 자네 그 밑천은 괜찮은가?” 하는 익살도 빠질 수 없다.

허공의 발이 얼마나 얼얼할까. 글쟁이 손가락에 펜혹이라는 굳은살이 붙듯이 줄꾼의 발에는 줄혹이 생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비단 그것뿐이겠는가. 수도 없이 떨어지고 까지고 부러져 온몸을 바친 상처가 곳곳에 훈장처럼 새겨져 있을 터.

줄꾼은 발을 헛디뎌 추락해서는 안 되며, 너무 높이 하늘로 치솟아도 아니 된다. 긴장을 늦추거나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도 실수할 것이다. 줄이 받아내는 탄력만큼 힘을 써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균형감각으로 오직 허공 줄에 순응할 뿐이다.

줄타기가 정점으로 치닫는다. 줄꾼에게 가장 어려운 동작은 ‘살판’이라고 한다. 뒤로 몸을 틀어 올려 공중돌기를 한 다음 외줄에 앉는 동작으로 ‘죽을 판 살 판’에서 유래됐을 만큼 줄꾼들을 겁먹게 하는 연행이다. 땅줄에서조차 물구나무도 서지 못하는 내가 살판을 이루는 허공제비의 황홀경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저 외로움이 오죽할까.

그때였다. 출렁거리던 줄이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어름사니가 외가닥 줄 위에 멈춰 섰다. 구경꾼들의 손아귀에도 땀이 고인다. 새어 나오는 탄성마저 애써 삼킨다. 지상에서 온갖 욕망으로 흔들렸을 몸이 자신마저 잊은 듯이 고요하다. 허공에 뿌리내린 한 그루 나무로 선 무아(無我)의 몸짓. 저것이 바로 살판을 뛰어넘는 최고난도 묘기가 아닌가. 줄타기란 단지 줄 재주만 부리는 것이 아닐 터이다.

진정한 줄꾼은 줄 위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열어야 한다. 저 순간만큼은 세상의 감각을 끊고 오관을 닫아야 하리. 관객의 환호도 악사의 장단 소리도 매호꾼의 줄재담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허공의 세계만 있을 뿐.

줄꾼이 합죽선을 모아 쥔다. 스스로 쥐고 펼 수 있는 것이 부채뿐이겠는가. 삶이란 언제나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을. 이제 두발로 땅 위에 방점을 찍을 차례. 비로소 허공을 잡은 손이 허공을 놓는다. 어찌 줄광대만 줄 인생을 살고 있으랴.

텅 빈 외줄 너머 국악원 부챗살 추녀가 곱다.

평론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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