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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아름다운 불편의 추억 /최정란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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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10-27 19:31:42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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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밀서나 왕의 밀지 같다. 섣불리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다.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받들어야 할 것 같다. 오래 기다려온 비밀의 연애편지 같다. 빨리 열고 싶은 조급함과 동시에 절대 열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주저함이 일어난다. 잘 여민 흰 속저고리 또는 흰 속치마 같다. 관능적이며 수줍다. 함부로 손을 대거나 감히 벗겨서는 안 될 것 같은 머뭇거림과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길항한다. 나에게 보내온 선물이다. 속저고리의 보이지 않는 고름을 풀 권리는 나에게 있다. 이윽고 두근거리는 설렘에 굴복한다.

밀봉된 책은 봉투 안에 들어 있다. 눈썹칼을 쥔 손이 떨린다. 귀한 초대장을 열듯 봉함 부분에 조심스레 칼을밀어 넣는다. 떨리는 손끝에서 온전한 백지 한 장이 벗겨져 나간다. 눈썹이 완성시키는 세계의 눈과 이마가 겹겹의 문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제 몇 시간 동안 나는 아름답고 진실한 언어예술 세계의 황홀한 시민이다. 동시대 시인들이 쓴 시와 시평과 그림과 사진과 뮤지컬과 영화에 대한 산문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불면의 손끝에서 피어난 언어의 꽃밭 사이 좁은 길 위에서 땅과 하늘을 오가며 영혼이 춤춘다.

기다려지는 모 문예지가 있었다. 편편이 통찰력 깊은 글, 아름다운 디자인, 적절한 두께와 크기, 손에 닿는 종이의 감촉이 모두 좋았다. 나는 이 년여에 걸쳐 이 문예지에 영화에 관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그러나 어느 날부터 우체통을 확인하며 이 잡지를 기다리기 시작한 근본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봉투 안에 책을 감싸고 있는 종이포장 때문이었다. 흰 종이는 네 귀가 딱 맞는 카드봉투 형태로 접혀 책의 피부처럼 책을 감싸 안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다음부터는 그렇거니 했다. 때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이 불편한 일을.

그러나 그것이 계속되었다. 단 한 번 예외도 없이 책은 흰 속옷을 단정히 갖추어 입고 파도 거친 세계를 헤엄쳐왔다. 한 번 발행될 때 대략 1000권 전후라 추산하면, 76호까지 발행되었으니, 자그마치 7만6000권이다. 그 많은 책을 일일이 네 귀를 맞추어 손으로 흰 종이를 접고 풀칠하는 일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흉내 내기도 어렵다. 지극한 정성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권 한 권 이 번거로움을 자처하는 발행인이 때로 미련스럽게 여겨지기조차 했다. 어느 날 문득 책의 속포장이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어떤 숭고한 태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한 가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이 포장에는 무엇보다 정성을 다하는 태도의 향기가 배어 있다. 책을 일일이 포장하는 발행인의 태도는 문학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계를 대하는 태도, 나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럴듯한 말, 번드르르한 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행동과 태도로 그 말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드물지만 행동과 태도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좀스럽고 사소한 일이라고 세상이 오해하더라도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근본일 것이다.

세상이 거대한 가치를 웅변하는 동안 작고 소중한 정성은 불편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졌다. 세계는 큰 담론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그 담론에서 파생되는 파괴적 균열을 메우고 폭력적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소한 기억이다.

그는 십 년 전 세상을 떠났고, 잡지는 더불어 폐간되었다. 지난주 그때의 사람들이 모였다. 정성스럽게 그리고 꾸준히! 사람의 몸은 사라져도 그의 태도와 자세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속에 여전히 미학적 실천으로 살아 남아 있다. 정신과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봉함을 뜯지 않은 잡지 한 권이 십여 년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작은 신비라 불러도 좋을, 말 없는 흰 덩어리 앞에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정성을 다하는 일, 마음을 다하는 일, 최선을 다하는 일, 그 모든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삶이 권태롭고 심드렁할 때면, 한결같은 손길로 몇만 권 책을 일일이 포장하던 한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한다. 그의 책상 위에 펼쳐진 말없는 백지가 되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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