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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임규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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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9-22 18:51:13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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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강은 움직이고, 자각은 사건을 거쳐 자부심에 이른다. 역사 공부의 실용성은 현재를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실용성 덕분에 망각과 무책임의 속성을 지닌 시간에게 평가를 맡기지 않아도 된다. 현재 평가된 역사는 생각과 실천의 힘을 강화한다. 현재화된 역사를 위해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말은 폐기되어야 한다. 역사는 가정이다.

사람마다, 나라마다 생각의 중심에는 차이가 있다. 다양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자유를 중심에 놓은 자유주의, 평등을 중심에 놓은 평등주의, 개인을 중심에 놓은 개인주의, 사회를 중심에 놓은 사회주의, 반공을 중심에 놓은 반공주의, 일본을 중심에 놓은 친일주의, 민족을 중심에 놓은 민족주의, 진보를 중심에 놓은 진보주의, 보수를 중심에 놓은 보수주의 등 ‘주의’는 수없이 많다. 한 사회에는 구성원 대다수가 합의한 ‘주의’와 구성원 대다수가 반대하는 ‘주의’가 있다. 구성원 대다수가 반대하는 ‘주의’ 신봉자에 대해 반사회적이라는 평가는 정당하다. 현재 우리 사회가 논란 없이 반대하는 ‘주의’는 ‘친일주의’가 으뜸이다. 친일주의는 우리 현대사에서 민족주의를 대신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반공주의로 위장한 친일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해방 전후 민족주의는 광범위했고 활발했다. 민족주의 안에 좌파와 우파, 중도파가 있었고, 대중적인 지지도 높았다. 독립운동사의 여러 논란도 민족주의를 중심에 두고 평가해야 그 진면목이 나타난다.

지난 7월 초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제한 조치를 취했다. 뛰어난 리더는 현재를 미래로 가져가지만, 야비한 혹은 무능한 리더는 현재를 과거로 가져간다. 아베의 생각의 중심은 메이지시대, 극우 제국주의인 듯하다. 프랑스 소설가 우엘벡이 쓴 소설 ‘복종’은 극우의 집권을 막기 위해 중도와 우파, 좌파가 연합하여 이슬람 정권을 탄생시킨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인종주의와 야만성을 특징으로 하는 극우가 이미 7년째 집권하고 있다. 국가든 개인이든 한 번 방향을 잡으면 그 방향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우리는 시민이 먼저 나섰다. 불매운동에 대해 일본은 얼마 안 가서 잠잠해진다고 했고, 우리 일부에서는 관계 악화를 걱정했고, 또 다른 일부는 차분한 대응을 요청했다. 모두 틀렸다. 얼마 안 가서 잠잠해진다는 주장에 대해 불매운동은 정서와 관련된 구조적인 현상이기에 틀렸다. 관계 악화와 차분한 대응은 일본을 우위로 가정한 친일주의적 관성적 사고, 그러므로 시대를 읽지 않은 오류이기에 틀렸다.

우리 사회는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권력의 작동 방식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국민이 직접 나서는 직접민주주의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번 일본의 도발은 수준 높은 개인주의에 수준 높은 민족주의가 더해지는 사건이 될 것이다.

다음은 정책적 차원의 검토다. 정책의 우선순위는 살리는 정책이 되어야 한다. 일본의 도발은 번영의 계기다. 번영은 산업정책을 통해 현실화된다. 산업정책 없이 번영을 이룬 나라는 없다. 우리는 뛰어난 산업정책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멀리는 세종대왕의 과학산업정책이 있고, 가까이는 김대중 정권의 IT산업정책이 있다.

김대중 정권의 IT산업정책은 우리나라를 IT강국으로 만들었다. IT산업정책으로 좋은 기회, 좋은 일자리가 무더기로 창출되었다. 책임 회피성 자금 배분이 아니라 전·후·좌·우방 효과가 큰 산업의 육성과 이익의 사회화 장치가 포함된 산업정책이다. 일본의 도발에 대한 지방정부 차원의 대응은 잘 설계된 산업정책이다.

다른 시간과 다른 속도가 충돌하고 있다. 시대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집단은 지위를 잃는다. 손자의 말에 속도를 더해, 상대를 알고 나를 알고 속도가 비슷하거나 빠르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짧은 역사는 가고, 오래된 역사가 귀환하고 있다. 현재화된 역사는 생각과 실천의 힘을 강화한다. 거대한 바람의 강에서 시원한 자부심을 느낀다.

작가·칼럼니스트·도서출판 함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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