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꽃이 핀다는 말이 있다. 경계를 두고 분리된 집단들이 각자의 고유성을 상호 교환하여 새로운 창조적 합의를 이룬다는 뜻이다. 일부 예술 분야뿐 아니라 문화 전반을 아우른다. 탈경계 즉 모든 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상호 텍스트성이 불가피하다. 너와 나, 이쪽과 저쪽을 분리하는 경계선 하지만 그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시 작업에 몰두하다 더러 머릿속이 어두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돌연변이’란 말을 떠올린다. 생물체에서 어버이의 계통에 없던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 유전하는 현상. 유전자나 염색체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 발생한다. 물론 이는 사전적 의미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시론(詩論, 예술론)이라 할 만하다. 계통에 없던 ‘새로운 형질’ 여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가령 여기 관상용 일반 난초 몇 점이 있다고 하자. 난초를 감상한다. 그놈이 그놈이다. 상투적이다. 이 난초나 저 난초나 다를 바 없다. 색다른 종과의 접합이 필요하다. 한 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시도 끝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난초가 탄생한다.
튤립 피버(Tulip Fever, 2017)라는 영화를 보았다. 치명적인 사랑과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을 그린 영화다. 아시아에 난초가 있다면 유럽엔 튤립이 있다. 네덜란드 꽃인 튤립의 원산지는 사실 터키라고 한다. 16세기 후반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독특한 모양(돌연변이)이 관심을 모으며 귀족이나 상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순식간에 귀족의 상징이 된 튤립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점점 가격이 치솟아 황소 천 마리를 팔아서 살 수 있는 튤립 구근이 겨우 40종 정도였다고 한다.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진 사람이 늘면서 급기야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거품경제 현상’으로 불리는 튤립 광풍이란 용어가 생겼을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영화에 등장하는 희귀 종은 백색 가운에 붉은 옷깃을 연상케 하는 튤립이었다. 따라서 단일 품종이나 단일 문화로는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없다. 당연히 새로운 것이 아름답고 새롭지 않은 것에는 미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돌연변이는 이것과 저것의 접목에 의해서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혼종이란 말, 혼합 장르라는 말, 4차 산업혁명, 융합과 통섭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서로 다른 단어인 만큼 개념의 차이도 있을 줄 안다. 각각의 근본을 논하는 것보다 이들 개념 속에 공통적 요소만 발췌해 생각해 보았다.
이와 관련된 두 꼭지의 국제신문 칼럼을 살폈다. 먼저 ‘세상읽기’ 코너이다. ‘부산문화 2030 비전 선언적 의미 넘어서야’를 읽었다. ‘이제는 혼합 장르의 시대이다. 혼종 문화 속에도 기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다양한 문화의 영역을 바탕으로 다양한 융합형 문화가 피어나도록 섬세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비전과 전략을 짤 때는 가치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을 지역 문화의 근본가치로 삼아 부산 문화의 내일을 설계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두 번째 칼럼은 ‘과학에세이’였다. ‘4차 산업혁명시대 기술과 인문학’이란 제목이다. 4차 산업혁명은 융합과 플랫폼의 시대이다. 자신의 업무, 자신의 직업·직군, 자신의 가치사슬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통해 최대한의 이익과 행복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의미다. 유명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하지만 미래 예측의 첩경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고 전한다.
이른바 인문학적 사고와 종합적인 사고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나 스스로가 혼종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문해 본다. 타종의 이론이나 학설의 논점에 대해 이념적 편향주의를 드러내지 않고 경청할 수 있겠는가. 진지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가. 이기주의적 태도에서 발생되는 적개심을 없애고 상대의 문화를 수용할 수 있겠는가.
‘예술적 돌연변이’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의 근간이 되는 ‘사상의 돌연변이’를 생각할 때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