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재수학원의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학생들을 깨우기 위해 기숙사 구석구석에 음악이 울려 퍼진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은수의 눈이 부스스 떠진다. 시간을 확인해본다. 오전 6시5분. 기상 음악이 길었던 덕에 침대에 5분이나 더 누워있을 수 있었다. 평소보다 긴 기상 음악이 길어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이제 강의동으로 가서 수업을 듣는다. 모르는 영단어가 나와, 찾아볼 생각에 휴대전화를 연다. 그의 휴대전화는 하얀색 폴더폰이다. 많은 수험생은 집중에 방해가 될까봐 스마트폰 대신 이 폴더폰을 쓴다. 휴대전화이긴 하나, 연락엔 잘 쓰이지 않는다.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은수도 휴대전화를 영어 사전이나 단어장 용도로만 쓸 뿐,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진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게 그에겐 편하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하루 중 은수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게다가 오늘은 그가 좋아하는 떡볶이와 감자튀김이 나왔다. 왠지 하루가 잘 풀리는 것 같다. 점심뿐이랴, 오늘의 마지막 수업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사다. 한국사는 입시 성적에 들어가는 비율이 낮아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한국사 시간까지 끝나고 이제 저녁 시간이다. 저녁 메뉴 자체도 좋았지만 더 좋았던 건 식후에 매점에서 사먹은 아이스크림이다. 예전의 그는 단 하루라도 아무 걱정없이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종종 빠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저녁 먹고 이렇게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을 수 있다면 썩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다 쉬었으니, 이제 강의실로 돌아가 자습을 해야 한다. 문학 문제집을 펴본다. 오늘은 최승호 시인의 시 ‘북어’부터 풀 차례다. 시를 빠르게 읽어본다.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 막대기 같은 생각 /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은수의 마음속에 아무런 울림 없이 시가 지나간다. 그는 이 시에서 말하는 북어가 자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스무 살 청년이 북어라고 칭해지며 비판받는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시 속의 북어들이 그에게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라며 아무리 부르짖어도 소용없다. 은수는 북어가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그리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자기가 북어인지 아닌지 하는 그런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을 수는 없다. 어서 다음 시,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 다 풀고 나서 은수는 채점을 해보았다. 다 맞았다. 오늘 본 시들이 어떤 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전보다 빠르게 풀고 많이 맞혔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일과를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와 하루를 되돌아본다. 기상 음악이 길었던 것부터 시작해 점심엔 떡볶이를 먹었고, 8시간 수업 중 1시간은 한국사였고, 저녁엔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평소에 어려워하던 시 문제들도 오늘은 모두 정답을 맞혔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하루였다. 그리고 이러한 날들이 그가 수능을 치르고 의대에 합격하고 전문의가 될 때까지, 11년이나 계속되었다.
의대에 입학해도 그는 학생의 ‘본분’에 충실했다. 매주 치는 시험에 하루 8시간 수업, 6시간의 자습을 유지했고, 시간이 모자라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다.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외부와는 단절됐다. 홍콩 시위가ㄷ 발생한 지 나흘이 지나서야 알았고, 우리 정부의 새 의료 정책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았다. 그는 높은 성적을 받아 자기가 원하는 과를 가기 위해, 홍콩 시민들이 처절하게 시위를 벌이는 동안, 우리나라의 의료 정책이 한창 논의되는 동안, 발바닥 근육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참고로 그는 안과 지망생이다.
누구에게나 이따금씩 생기는 조그마한 여유가 있다. 은수는 그 찰나의 여유 동안 그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거 먹고 즐거운 곳 갈 수 있으면, 사소하지만 벅찬, 충분한, 행복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내일이 시험이고, 다음 주도 시험이고, 다다음 주도 시험인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정말?
오늘도 북어가 바싹 말라간다. 어선 밖을 바라보지 못한 고기는 이렇게 북어가 되었다.
동아대 의학과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