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眞)·선(善)·미(美)라는 말은 아름답다. 그런데 이 근사한 범주를 생각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곧잘 들곤 했다. 진은 진리와 관련된 영역이니 학문, 선은 착함과 연관돼 있으니 윤리와 도덕, 아름다움을 뜻하는 미는 예술에 대응되는 것으로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럴듯한 분석이 아닌가? 예술 현장을 취재하면서 거듭 궁리해본 결과, 이 분석은 완벽에 가까운 천만의 말씀이었다. 틀린 생각이었다는 뜻이다.
예술에 한정해서 이야기해보자. 취재기자로서 현장에서 본 예술은 미의 범주에 한정되는 게 아니었다. 예술 안에는 진·선·미가 모두 함께 들어가 있고, 들어가 있어야 한다. 차라리 예술은 사람 앞에 놓인, 사람이 만든 ‘진흙공’ 같아 보였다. 그 진흙공의 구성 성분은 대략 공감의 요소, 아름다움의 요소, 새로움의 요소이다.
다만, 이 진흙공과 관련해서는 유념할 점이 몇 개 있다. 진흙공마다(작품마다) 공감·아름다움·새로움 요소의 함량 비율이 다 다르다는 점이 첫째다. 어떤 작품은 공감의 요소가 매우 강하다 보니 새로움은 덜하고, 어떤 작품은 아주 새롭다 보니 잘 알아먹기 어려우며 공감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 진흙공은 쓰임새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이 진흙공을 가지고 놀다가 삶의 거룩하고 거대한 이치와 가치를 깨우치는 데까지 상승해버린다. 어떤 경우 겨우 덧없이 소비하는 데 그치고 만다. 물론, 이렇게 소비되는 양태 또한 넓은 의미의 예술이 감당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 반성이나 성찰과는 무관한 갈등과 상처의 원천으로 예술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가장 나쁜 경우라고 하겠다.
다시 진·선·미로 가본다. 예술은 미의 영역에 한정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진·선·미를 모두 포괄한다. 그 증거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예술 작품을 향유한 수많은 인간이 ‘변화’해왔다는 점이다. 아름다움(美)만을 만나는 것으로 사람은 바뀌기 힘들다. 진·선·미 가운데 진(眞)이라는 항목은 ‘옳고 바른 것은 존재하며 우리는 그 옳고 바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전제를 알려준다. 선(善)은 우리가 착하고 좋은 쪽으로 실천하면서 마침내 선한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또한 전제로 한다.
그렇게 진·선·미가 한 몸으로 뒤섞이고 어우러진 것이 예술이고 예술작품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예술을 향유하는 아주 높은 단계’에 관해 좀 더 깊이 생각하게 해주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술을 향유하는 아주 높은, 거의 가장 높은 단계는 그것을 접한 사람이 더 좋게 변화하는 데 있다. 사람이 더 좋게 바뀌는 것이다. 예술을 줄곧 오래 접한 사람이 ‘아!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바뀔 수 있겠구나’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사색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작품을 그저 소비하는 데 그친다면 사실 그 예술은 별로 필요 없는 것이다. 예술 대신 다른 걸 즐기면 된다.
이런 변화를 도와주고, 그런 바뀜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능이 진·선·미 가운데 진과 선에 많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진과 선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돌아보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예술이 가진 ‘거울’ 기능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술을 사랑하면 가슴속에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을 하나 갖는 셈이다. 이것을 예술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중요한 쓸모라고 생각한다.
창의성과 다양성이 꽃피게 하는 힘, 세상을 더 절실하게 인식하게 해주는 힘, 사람의 마음이 트이고 열리게(疏·트일 소)하여 서로 통(通·통할 통)하게 하는 소통의 힘 같은 예술의 덕목은 그런 거울 기능을 따라오는 것이다. 하물며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예술을 함부로 가벼이만 사용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작가 박경리(1926~2008) 선생과 ‘토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오는 15일은 ‘소설 토지의날’이다. 이날 강원도 원주시 토지길 박경리문학공원에서 기념행사도 열린다. 사연을 찾아보니,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 1부의 첫 장면이 1897년 음력 8월 15일 한가위 날이고 ‘토지’가 끝나는 날도 1945년 8월 15일이다. ‘토지’ 전체 (모두 5부 20권)가 26년 만에 완간된 날도 1994년 8월 15일이었다.
박경리 선생과 ‘토지’의 높은 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면,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것이라고 나무랄 분이 계실 것이다. 하지만 예술작품 ‘토지’와 ‘소설 토지의날’을 앞두고 다시 찾아본 박경리 선생의 삶과 예술에 관한 자료를 곱씹으면서 나는 예술의 쓸모에 관한 근본적인 생각을 자꾸만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예술과 실천으로 자기 삶을 꽃피우고, 독자의 삶이 바뀌게 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토지’를 앞에 놓고 예술의 쓸모를 생각하면서 나는 박경리 선생께 깊이 고마웠다.
편집부국장 겸 인문연구소장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