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전품이 수출로 잘나가던 1987년의 일이다. 전경련 회관에 이례적으로 국내 대기업 간부와 연구소 관계자, 상공부 고위 공무원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가전제품의 꽃’인 VTR(비디오 테이프 리코더)의 부품·소재와 관련된 문제가 심각해서였다. 요지는 우리 메이커들이 VTR 설계부터 외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자체 기술로 만들지만, 주요 부품은 일본산 의존도가 계속 높아지니 그 해결방안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었다.
예컨대 당시 VTR 하나에 들어가는 부품 1670여 개 중 국산화가 전혀 안 된 게 400개에 이르렀다. 그 중 핵심 부품 1개만도 연간 1억3000만 달러어치를 사들였다. 그러니 우리 공산품 수출이 늘수록 일본 부품 수입도 덩달아 증가하고, 대일 무역적자도 심화시켰다. 정부는 이런 구조를 개선하려고 1991년까지 5개년 계획을 마련해 부품·소재·기계류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에다 민관 합동으로 대책위원회도 꾸렸다.
그렇게 했지만, 핵심 부품·소재의 대일 의존도는 호전되지 않고 되레 깊어졌다. 1992년 상공부의 조사 결과가 그렇다. 심지어 일부 전자전기 분야에서는 일본 부품을 아예 전량 수입하는 걸로 드러났다.
‘가마우지 경제’란 말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최근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브리핑 때, “가마우지 경제체제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회자된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일본의 고무로 나오키라는 경제평론가가 쓴 책에서 인용됐다. 그가 1988년 펴낸 ‘한국의 붕괴’에 나온다. 물새인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낚시법에 빗댄 말이다. 한국이 완성품을 수출하면 할수록 이득은 그 부품·소재를 공급하는 일본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결국 ‘가마우지=한국경제, 어부=일본’이란 것이니,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굴욕적 언사다.
그에 앞서 1986년, 대만 출신의 저명한 사세휘(謝世輝) 일본 도카이대학 교수가 출간한 책이 화제를 모았다.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고 한국에 지게 되는 이유’라는 긴 제목인데, 우리에게는 귀가 솔깃하게 들렸다. 그는 저서에서 한국이 2010년에 일본을 능가할 걸로 내다봤다. 양국의 큰 경제력 격차에도 불구하고 장래는 한국이 유리하다는 점에서다. 그 요소로 독창성과 강인성, 교육열, 근면성, 위기극복 능력 등을 꼽았다. 1960년대 초 그의 예측처럼 일본이 25년여 만에 미국 경제를 따라잡았듯이 한국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 전제이자 해결과제 격으로 한국의 약점을 크게 세 가지 들었다.
요약하면, 첫째가 중소기업이다. 일본의 강점은 높은 기술과 생산효율을 지닌 중소기업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데 비해 한국은 대기업 중심과 재벌그룹의 문어발 사업 탓에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또 연구개발비가 현저히 낮고, 산업기반이 일본 의존형으로 취약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은 중소기업 육성과 연구개발에 의한 기초기술력 강화, 품질관리 향상이 가장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한국의 대일 의존 탈피와 추월을 위한 처방 격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금의 상황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일본 부품·소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같은 정밀산업에서는 자체 조달률이 50%에도 못 미친다. 얼마 전 현대경제연구원의 ‘한일 주요산업 경쟁력 비교 보고서’로는 한국 산업에서 일본 수입의존도가 90%이상인 폼목만 48개이고, 총수입액은 27억8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차량·항공기·선박과 수송기기 관련품 등의 특정 분야는 일본 의존도가 거의 절대적이다. 뼈아픈 현실이나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그간 우리의 기술력 제고 노력 등으로 일본 의존도가 과거에 비해 갈수록 감소하는 추세여서다.
핵심 소재·부품과 장비류의 경쟁력을 키우는 핵심은 역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체계에 있다. 힘겹게 기술을 개발해도 대기업이 납품받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어서다. 중소기업의 기술을 북돋우고 그걸 대기업과 연계해 접목·응용하는 토대가 갖춰져 있느냐가 우리와 일본의 근본적 차이다. 게다가 미국이나 독일, 일본에서처럼 중소기업 등이 가진 첨단기술을 모두 집약해 관리하고 세밀하게 지원하는 컨트롤타워 기능이 절실하다.
정부가 내놓은 소재·부품·장비류 경쟁력 강화 대책도 이런 요소들이 뒷받침되어야 효과를 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일본의 수출규제와 경제도발이 아니어도 주요 부품·소재의 국산화와 산업체질 혁신 등은 어차피 우리가 이뤄야 할 일들이다. 특히 핵심 기술분야에서 일본 종속에서 벗어나고 원천기술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일본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렇게 하면, 시기가 좀 늦더라도 사세휘 교수의 예측처럼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지 못하란 법이 없다.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