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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아무도 악역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 /강필희

극일 항일 외치기는 쉽지만 말로서 나라 지켜낼순 없어

박수 탐하며 친일몰이 말고 진짜 국익 무엇인지 고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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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부산에 있는 일본 대기업의 한국출장소에 근무하는 그는 본사에서 주문이 오면 해당 부품을 생산하는 한국 기업과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 일본 기업의 필요에 의해서지만 한국 기업에도 수출길을 터주는 좋은 일이다. 이상한 낌새가 생긴 건 올 초부터였다. 항상 혼자 출장을 오던 일본 본사 직원이 중국인을 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래선을 한국에서 중국으로 바꾸려는 신호였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한 게 지난달 초다. 그러나 일본의 유관 기업들은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작년 10월 이후부터 이미 탈한국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지인은 “일본이 정말 무서운 나라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이 벌써 한 달째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본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정치권은 미국과 일본에 의원단을 파견해 중재 요청과 외교적 해결 노력을 병행했지만 아직은 성과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일본대사관이나 영사관이 있는 서울과 부산 등지에선 반일 시위가 격해지고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규모가 커지고 있다. 부산시는 아예 일본과의 행정교류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은 2일 국무회의를 열고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처리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 차이는 2018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기준 일본이 3배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자국 기업도 피해를 입을 것이라곤 하지만 우리가 받는 규모에 비하면 미미할 뿐이다. “일본은 전체 수출액의 0.001%를 규제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타격을 입는 반도체는 수출액의 25%다.” WTO 일반이사회에 참석했던 김승호 산업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이 귀국길에 한 이 말 속에 정답이 있다. 지한파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일본 지식인들과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반도체 제조가 한국 경제에 갖는 의의를 생각하면 이번 조치는 한국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한 걱정 속에도 우리가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이라크 파병을 두고 여당 내에서 반대가 더 거셌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국익을 위한 선택이었고 지금은 누구도 그 효용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한일청구권협정도 마찬가지이다. 1965년 당시 우리가 받은 5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단순 보상이었다는 주장을 지금 아무리 해봐야 실익이 없다. 2005년 노무현 정부의 민관공동위원회도 이를 알기에 우리 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6200억 원을 지급한 것 아닌가. 우리 논리만으로 일본을 바꿀 수 없고 일본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지만 그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아시아에 일제 36년 식민지배로 고통받은 한국이 있다면, 유럽엔 75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가 있다. 영국은 아일랜드 고유어를 못 쓰게 하고 일체의 교육도 시키지 않았다. 1699년엔 자국 상인 보호를 위해 아일랜드의 모직물 수출을 금지시켜 버렸다. 빈곤의 나락에 떨어진 아일랜드에 대기근까지 들어 무려 인구의 4분의 1이 굶어죽거나 나라를 떠나야했다.

아일랜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온갖 고통 끝에 IT 산업을 일으켜 1996년엔 식민지배 종주국이었던 영국의 GDP를 따라잡았다. ‘부자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를 쓴 에릭 라이너트는 “식민지 아일랜드가 모직물 수출을 봉쇄당한 지 300년 뒤 정보기술로 영국을 추월한 일은 거대한 서사시”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일랜드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나라가 타국에 당한 수모를 어떻게 갚는지를 배우는 반면교사는 될 것이다.

누구나 극일과 항일을 입에 올리긴 쉽다. 하지만 지금은 100년 전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하던 시절이 아니다.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는 대법관도 있지만 붓으로 세운 나라 없고 말로서 지킨 나라도 없다. 식민지 때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이끌고 대영투쟁의 선봉에 섰던 혁명가 마이클 콜린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선 불완전하지만 영국과 전쟁을 끝내는 협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본인은 목숨을 잃어야 했으나 그 선택의 불가피성은 아일랜드 역사가 평가한다.

어떤 정권이든 정부 여당은 실리를, 야당은 명분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반대다. 현실에 발을 딛고 진짜 국익이 무엇인지 머리를 싸매야 할 사람들이 친일몰이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들이 악역을 마다하고 갈채만 탐한 대가는 결국 기업과 국민이 지게 될 것이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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