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 뿌리 깊은 반일 감정 탓에 일본 문제 만큼은 이성적이지 못한 것 같다. 한일 축구 경기에도 사활을 거는 마당에 아베 정권이 먼저 도발해왔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 정부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동북아 기술 패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비교우위에 있는 소재와 부품의 대(對)한국 수출 통제를 강화했다. 한국이 일본을 추격하기 전에 싹을 자르겠다는 ‘신정한론(新征韓論)’을 실천한 셈이다. 뒤집어 보면 한국에 따라잡힐 수 있다는 일본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총·균·쇠’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최근 펴낸 저서 ‘대변동’은 국가 위기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다룬 위기는 크게 전쟁과 국내 분열 등 두 가지. 국가 정체성에 기반을 둔 선택적 변화를 추구한 국가는 내우외환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우리는 지금 다이아몬드 교수가 언급한 두 가지 위기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일본과 ‘경제전쟁’을 벌이는 준(準)전시 상태다. 국민 대다수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인 ‘보이콧 재팬’에 동참하고 있다. 잘나가던 일본 승용차와 맥주가 팔리지 않고 일본 여행객도 급감했다. 대한항공과 에어부산은 9월부터 부산~삿포로, 대구~나리타 노선의 운항을 각각 중단하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권은 나라를 걱정하며 한마음으로 뭉친 민초와 달리 분열 양상을 보인다. 여야는 ‘친일 프레임’을 놓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최근 청와대를 떠난 조국 전 민정수석이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불을 지폈다. “이러한 상황(경제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이적(利敵)’이냐이다.”
친일 프레임이 국민에게 먹히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급상승한 반면 자유한국당은 급락했다. 국익을 최우선 삼아 똘똘 뭉쳐야 할 시점에 정치권이 일본 변수가 내년 4월 총선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는 데 몰두할까 봐 우려스럽다. 오죽했으면 문희상 국회의장이 지난 30일 국회 방일의원단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보고가 엇갈려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역사를 거론하면서 “일본에 가서 이견이 있더라도 한 목소리를 내달라”고 당부했을까.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같은 날 “국민은 불매운동과 함께 국회와 정치도 국산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자성론을 제기했다.
경제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일본 측 수입 의존도가 높은 산업을 국산화하는 게 중요하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최근 내놓은 ‘한일 주요 산업의 경쟁력 비교와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상품의 품목은 4227개이고 이 중 일본 수입 의존도가 90% 이상인 품목은 48개, 27억8000달러(3조3000억 원)로 나타났다. 수입의존도 50% 이상인 품목은 253개, 158억5000억 달러(18조8147억 원)였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강화되면 수입 의존도가 높은 중화학공업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보호무역주의 타깃이 무역 자체에서 기술로 전환되는 추세에 대응해 핵심 소재 및 부품에 관한 연구·개발(R&D) 투자 확대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50년간 산업화 과정에서 ‘추격자(Fast follower)’로서 선진 기술을 빨리 베끼면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지만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R&D와 혁신을 바탕으로 ‘선도자(First mover)’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문제는 R&D 투자는 ‘1+1=2’식으로 투입하면 당장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가깝다. 노벨상 수상자 25명을 배출한 일본의 기술력을 극복하려면 R&D 투자가 지속해서 이뤄져야 한다. 관련 법 개·제정과 예산 확보를 포함한 정치권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눈앞의 표가 아니라 멀리 국익을 내다보는 것, 국회 국산화의 출발점이다. 국회가 국론을 모으는 데 앞장선다면 이번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