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가도 모를 일본이다. 친구처럼 지내다가 돌연 적이 되었다. 칼을 뽑은 기세가 흡사 사무라이다. 일제하 강제징용 배상 등 과거사 문제의 뇌관이 터졌기로서니, 경제보복을 가해올 건 뭔가? 적반하장이다. 일본은 반도체 핵심 부품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행했고,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전략물자 수출 우대국)에서 제외하는 수순도 밟고 있다. 기술 패권을 무기로 한국의 약한 고리를 정밀 타격한 격이다. 적대적·노골적 경제 보복이다. 참혹한 임진왜란과 36년간의 식민 지배, 남북 분단과 6·25전쟁의 원죄까지 두루 연루되어 있는 그들이 기어이 경제전쟁을 걸어왔다. 이름하여 ‘기해왜란(己亥倭亂)’이다.
예의 주시할 건 일본이 찔러온 부분이다. 자기 상처를 감추고 찔러 올 때는 찌르는 이유가 있는 법. 한국의 과거사 인식 및 처리에 대한 불신이 표면적 이유지만, 위협 수준에 이른 한국 경제를 흔들어보겠다는 의도가 짙다.
여기서 생각하게 된다. ‘한국의 경제력이 그렇게 대단했나’. 우리도 잘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경제전쟁으로 일깨워주니 언감생심 고마운 면도 있다. 인터넷 자료를 찾아 비교해보니, 한국이 위협 수준에 이른 건 사실이었다. 세계은행 자료에서 1988년 일본 국내총생산(GDP)은 3조720억 달러로 한국(1960억 달러)보다 15.6배나 컸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3.1배(일본 4조9710억 달러, 한국 1조6190억 달러)까지 좁혀졌다. 지난해 기준 한국 1인당 GDP는 3만1362달러(27위)로 일본(3만9286달러, 24위)을 바짝 뒤쫓고 있다. 총수출액 규모는 일본 6위, 한국 4위다. 국가신용등급은 우리가 앞선다.
20~30년 전만 해도 일제(日製)는 숫제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소니 워크맨은 걸어 다니는 신화였다. 그런 소니를 삼성이 눌렀다. 2005년 전후다. 당시 언론은 ‘소니 격침’으로 표현했다. 그후 ‘잃어버린 10년’을 겪고 보니, 한국이 더욱 성큼 커져 있다. 한국의 반도체는 세계 최강 브랜드로 부상했다. 일본의 보수 우익이 두고 볼 리 없다.
좋게 보면 한국이 성공적으로 일제 식민 체제를 극복해 온 결과다. 이를 인정하고 동북아 평화를 공동 모토로 같이 잘 살 궁리를 해야 하는데, 일본의 본심은 그게 아니었던 거다. 자유무역시대에 기술패권을 무기로 전쟁을 선포한 모습에서 군국 본색을 본다.
원하든, 원치 않든 싸움은 시작되었다. 주화파·주전파가 나타났고 (신)친일파가 등장했다. 주화파는 현실이 무너져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자존(自尊)보다 생존(生存)이 먼저다.” “나라가 있어야 애국도 있다.” 주전파는 명분을 앞세워 비분강개한다. “화해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화해를 구하는 것은 화(和)가 아니라 항(降)이다.” “21세기 의병이 필요하다.”
말은 길길이 날뛰지만, 전선은 지리멸렬했다. 보다 못한 국민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며 ‘보이콧 재팬’ 운동에 불을 지폈다. 모진 역사를 겪어온 우리 민초의 눈에 핏발이 섰다. 민초는 정치권의 헛소리를 질타하고, 행주치마에 ‘돌멩이’를 담아 날랐다.
싸움이 불리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최대 이슈는 ‘경제적 극일(克日)’이다. “많은 산업에서 일본을 극복하며 추월하고 있다”고 대통령은 말하지만, 국민은 불안해한다. 솔직히 궁금하다. 한일 경제력의 정확한 실상과 비교 우위, 기술·소재 산업의 대체 가능성과 국산화의 과제 그리고 화이트 리스트 제외 시 우리 경제가 입게 될 피해…. 정부는 객관적인 정보와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고 신뢰 전선을 구축하는 게 우선이다. 한국인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늘 창의력을 발휘해 온 민족이다. 극일은 결코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다. 신뢰는 그 자체로 자산이다. 국가나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국가 간 신뢰’를 거론하는 일본을 설득할 카드도 준비해야 한다.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에 편승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해왜란 그 너머를 봐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일본을 이기는 게 아니라, 동북아 평화시대의 열쇠를 찾는 것이다.
칼럼니스트·스토리랩 수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