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최강국이다. 경제력이나 군사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미국을 넘어서는 나라는 현재 없다. 그래도 굳이 모자란 점을 꼽으려 한다면 일천한 역사를 거론할 이가 많을 듯하다. 영국의 식민지로 존재하다 1776년 독립을 선언했으니 내세울 만한 전통이나 유산을 찾기는 어렵다. 이러니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들이 이 분야에서라도 미국을 한 수 아래로 대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자들은 건국 250년이 못 되는 미국이 짧은 시간 내 세계를 호령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 포용성을 꼽는다. 인종이나 종교, 출신 국가 등을 따지지 않고 이민자들을 미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하나로 녹인 것이 지금과 같은 번영을 이룬 원동력이라 평가한다. 이 나라에 ‘멜팅 팟’(Melting Pot·인종의 용광로)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까닭이다.
이런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미국이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탓에 안팎으로 궁지에 몰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민주당 내 유색 여성 하원의원 4명을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나라 출신”이라 비꼬았다. 이어 미국 정치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일 게 아니라 “원래의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글까지 남겼다.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적 글이 공개되자 국내외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대통령의 혐오 발언을 규탄하는 결의안의 채택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90여 명의 민주당 의원이 동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 일부 의원도 “선을 넘은 발언”이라며 비난 대열에 가세했다. CNN 등 주요 매체들과 영국, 캐나다 등의 지도자들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막말에 부정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작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더 많다며 적반하장식 태도로 맞서고 있다. 정치계에서는 노림수에 능한 대통령이 지지자 결집을 위해 이 같은 파문까지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 같다며 혀를 내두른다. 사실 그의 돌출 행동과 막말은 워낙 많이 접한 터여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례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자국이 250년 동안 고집스럽게 지켜온 ‘멜팅 팟’ 원칙을 대통령이 앞장서서 깨려는 것은 단순한 인종차별이 아니라 ‘반(反)미국적’ 행위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번 만큼은 트럼프 대통령이 ‘누울 자리를 생각하지 않은 채 다리를 뻗은 것’이 아닌가 싶다.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