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첫 주에 지인들과 4박5일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다녀왔다.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이라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잠만 자고,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 유적지와 고려인 후손이 운영하는 기관들을 탐방하였다. 여행 둘째 날,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 방문 때부터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한 나의 무지함 탓에 부끄러움이 시작되었다. 우리 독립 의사들의 항거와 함께 기억되어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이름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생소한 이름들이 계속 다가왔다. 그중 나의 부끄러움을 극대화시킨 이름은 난로를 의미하는 러시아 말 ‘페치카’란 애칭으로 불리던 최재형 선생이었다.
최재형 선생은 우리 항일 무장투쟁의 아버지로 한국 역사책에 기록되어야 할 분이다. ‘페치카’란 애칭은 이국땅에 사는 동포에게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과학 전공의 대학 교수가 최재형 선생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은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라는 주위의 위로로 조금씩 누그러들었지만, 남은 블라디보스토크 여행기간과 귀국 후 지금까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최재형 선생이 왜 그런 삶을 선택했을까 하는 질문이다.
러시아 사회에서 인정받는 러시아인으로 살면서, 소수 민족이긴 하지만 명문가 혈통을 이어가도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소수 민족이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질문의 전제가 잘못된 것이라 할 수도 있지만, 최재형 선생이 동포를 위한 삶을 선택하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 것은 볼셰비키 혁명 훨씬 이전이다. 혁명 이후라도 최재형 선생 본인과 그의 능력, 처세술을 이어받은 후손들은 소비에트 정권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최재형 선생은 1860년 함경북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9세 때 아버지와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잘 살아보자는 러시안 드림이 아니라, 고향 땅에는 굶어 죽거나 맞아 죽을 일만 남아 있기 때문에 고향을 등졌을 것이다. 소년 최재형의 마음에 조국은 없었을 것이다. 11세 때 가출했다가 쓰러져 죽어가는 것을 러시아 상선의 선원들이 구해줬고, 소년 최재형의 근면함과 영특함에 반한 러시아인 선장 부부의 후견으로 가출 10년 뒤 성공한 사업가로 가족에 돌아간다. 유창한 러시아어 구사 능력과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러시아 군·관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였다. 그의 사업 중 하나가 러시아 군납 사업이었으니 그에 대한 러시아인의 신임은 대단했을 것이다. 두 차례나 러시아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갖고 5개의 훈장을 받았다.
최재형 선생의 동포를 위한 교육열은, 선생이 1891년 설립한 연추 니콜라예프스코예 소학교가 1899년 연해주 내 최우수 러시아 소학교로 평가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이국땅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동포를 위해 훌륭한 학교를 세웠다는 건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놀라운 것은 최재형 선생이 항일의병의 군자금으로 1만3000루블이란 거금을 쾌척하고, 직접 일본군과의 전투를 지휘했다는 것이다. 1920년 4월 최재형 선생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대대로 조선의 고위 관직을 이어 온 명문가인 이회영 선생의 일가도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쓰고 헌신하였다. 편안한 삶을 버리고 항일운동에 까지 뛰어들어 자신과 가족, 후손의 삶까지 희생의 길로 접어들게 한 독립 의사가 많다. 그럼에도 최재형 선생의 삶에 유독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는, 그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러시아인으로서 사업을 잘하며, 러시아 땅의 동포를 위한 교육 등 공익사업들만으로도 충분히 페치카 최재형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사업가 최재형 선생으로 하여금 무기를 들게 만든 것일까?
최재형 선생의 초상을 보고 있으면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선생님. 저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은 그런데 작은 불편들이 자꾸 느껴지면서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제 생각과 마음이 이렇게 따로 놉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고 하면, 선생께서는 뭐라고 하실까? 질문의 수준에 화를 내실까? 아니면 페치카 같은 따뜻한 미소로 답하실까?
동의대 공공인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