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에 다녀왔다. 전시회가 개막한 이후 누적 관람객 수가 22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지난 주말에도 인파가 넘쳐났다. 길게 늘어선 대기행렬 속에 끼어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기 까지 꽤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의 작품인 ‘예술가의 초상’이 지난해에 1000억이 넘는 고가에 판매되었다는 얘기가 절로 실감이 났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우리 시대에 가장 큰 인기를 구가하는 아티스트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의 작품 133점을 만날 수 있었다. 회화와 드로잉, 판화 등 여러 장르의 작품들이었다.
여든 살이 넘었지만 호크니는 얼리어답터로 알려져 있다. 그는 화가이면서 판화가 무대미술가 사진가이고, 그가 아이패드로 작업한 작품들은 세계인들의 각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콘스탄티노스 페트루 카바피스의 시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우선 눈에 띄었다. 전시회 안내 소책자에는 ‘콘스탄틴 카바피’라고 쓰여 있는데, 아마도 그리스의 시인 콘스탄티노스 페트루 카바피스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카바피스의 시 ‘이타카’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이타카로 떠날 때는/ 기도하라, 여행 길고 길은,/ 모험 가득 차 있기를, 지식 가득 차 있기를./(…)/ 기도하라 길이 길기를/ 숱한 여름 아침 있기를/ 네가 엄청 즐거워하며, 엄청 기뻐하며/ 처음 보는 항구로 들어갈 아침 말이다/ 네가 페니키아 상점에서 멈추고/ 세련된 보물 구입하기를/ 자개와 산호, 호박과 흑단과/ 육감적인 향수를 온갖 종류로/ 육감적인 향수를 가능한 한 많이/ 네가 숱한 이집트 도시에 가서/ 학자들한테 배우고 또 배우기를’이라고 썼다. 이 시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장례식에서 낭독되기도 했다. 카바피스의 파격적인 언어와 동성(同性)에 대한 탐미적인 사랑의 시편은 호크니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은 호크니의 작품들에서 동성의 육체에 대한 욕망의 표현으로 나타났다.
전시회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이 머문 작품은 단연 ‘더 큰 첨벙’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호크니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시기인 1967년에 창작되었다. 그곳의 맑고 건조한 공기, 작열하는 빛 등에 매료되어 그렸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점보다는 아주 강렬한 대낮의 정적을, 그 시공간을 일시에 깨는 어떤 충격을 생생하게 포착한 것으로 읽혔다. 마치 유리컵이 바닥에 깨지는 순간의 파열음을 잡아채는 것처럼…. 그는 수영장 수면의 고요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우연한 행위를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는 고요함의 내부에서 들끓고 있는 에너지를 바깥으로 끌어내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피카소를 흠모해서 창작한 ‘푸른 기타’ 시리즈와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 등도 관심을 끌었다. 나는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예술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라는 점에 대해 생각했다. 호크니는 “나는 사물을 보는 방식 그리고 본 것을 단순하게 사고하는 방법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고, 또 “눈은 언제나 움직인다. 눈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눈이 움직일 때, 내가 보는 방식에 따라 시점도 달라지기 때문에 대상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실제로 다섯 명의 인물을 바라볼 때 그곳에는 1000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고 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이고, 각자가 갖고 있는 기억에 의존해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창작된 예술 작품이 우리의 삶을 보다 탄력 있게 해줄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호크니는 농장으로 가는 길을 한 해에 일곱 차례 그리기도 했다. 그 길은 변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때에는 나무들이 풍요롭게 솟아 있고, 어느 때에는 잎이 시든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표현하려 했고, 인간도 이 자연의 일부라고 여겼다. 그는 “여름은 땅이 멋져요. 땅의 표면 말이에요. 안 그래요? 길의 색을 봐요. 다양하고 극적인 모습이에요”라고 말했다. 이런 바깥 세계의 변화를 그림에 다 그려 넣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이 화가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직관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대상을 이해하고 나면 자신의 첫 생각을 믿어야 해요. 그리고 그날의 특별한 선택을 믿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자신이 갖게 된 예감과 착상을 신뢰하지 않고선 진전이 어렵다고 보았다. 이러한 태도는 그만의 창작 작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 대해 가져야 할 신념으로도 썩 괜찮은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자신을 반신반의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호크니의 작품들 또한 그의 첫 생각이 짓고 만든 윤곽선이요, 형태요, 건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 관한 한 문외한이지만 호크니가 보여주는 원근 기억 공간에 대한 해석은 인상적이었다. 가령 그는 하나의 얼굴 안에 여러 표정을 구현한다. 튀어나온 것과 평평한 것, 멈춤과 이동, 옛것과 신생의 것을 하나의 구도에 넣는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대단히 유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역동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을 고정적인 것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의 유동적이고 가역적인 속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의 마음에 이처럼 여럿의 감정과 사유가 들어있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이해를 훨씬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를 자신에게도 적용한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망설임, 두려움, 설렘, 기쁨과 환락, 우울과 고독, 슬픔, 거부하는 것과 욕망하는 것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말과 행동 등에 대해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고, 그리하여 자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회를 나올 때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호크니가 한 말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영원한 것은 현재이에요. 순간이 모든 것에 우선해요. 그리고 삶은 큰 선물이에요. 제 인생관이지요. 지금의 삶을 사랑하세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