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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여좌천변으로 가는 좁은 길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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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6-13 19:24:20
  •  |   본지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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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풍경’의 소설가 박태원(1909~1986) 선생에게는 ‘서울 청계천’이 그의 천변(川邊)이었다면, 제가 자주 찾는 천변은 ‘진해 여좌천(餘佐川)’입니다. 여좌천은 창원시 진해구 여좌동에서 충무동을 거쳐 진해만으로 흘러드는 지방하천입니다. 소설가 구보 씨는 청계천변을 거닐고 시인 아무개는 여좌천변을 거닙니다.

발원지가 진해 장복산인 여좌천은 그 길이가 4.5㎞쯤 됩니다. 길지 않고 폭도 좁은 물길입니다. 큰 비가 아니면 여흘여흘 흘러갈 일은 없지만, 그래도 발밤발밤 제 길을 밀고 가는 맑은 물길과 주변 자연이 만드는 풍경이 아름다운 내입니다. 여좌천변의 지킴이는 벚나무입니다. 여좌천 상류 쪽에 자리한 진해 파크랜드에서 진해여고까지 이르는 1.5㎞ 구간에는 양옆으로 벚나무가 장엄하게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벚나무에 벚꽃이 피는 시기의 천변풍경에 환호하지만, 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 어느 때든 천변의 풍성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좌천은 우리나라 대표 벚꽃축제인 진해군항제가 열리는 4월 초가 되면 좌우로 만개한 벚꽃이 꽃 터널을 만듭니다. 한 해에 200만 명이 다녀간다는 벚꽃 명소라 하니 이미 많은 사람이 이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천변에는 몇 개의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다리가 ‘로망스 다리’입니다. 2002년 진해가 배경이 된 MBC 드라마 ‘로망스’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지만, 여교사(김하늘)를 사랑한 나이를 속인 고등학생(김재원)의 러브스토리가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란 대사와 함께 아직껏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인기 드라마의 촬영지로 로망스란 보통명사를 고유명사로 만들어버린 로망스 다리는 ‘사랑이 이뤄지는 다리’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관광객이 찾아옵니다. 마치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사랑소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세계적 명소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여좌천변이 그런 사랑의 명소만은 아닙니다. 봄에는 꽃이, 여름에는 잎이, 가을에는 낙엽이, 겨울에는 빈손의 겨울나무의 도열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공간입니다.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살아 있고 사람과 함께 숨 쉬는 풍경이 되는 곳입니다. 멈춰진 풍경은 벽에 걸린 액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엇보다 제가 여좌천변을 사랑하는 것은 제 어머니가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로 저는 여좌천변을 자주 찾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생의 거처가 여좌천변입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그 곳에 주소를 두고 살고 있습니다. 천변 따라 걷고 천변 따라 오가며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가는 길이 여좌천변에 있고, 어머니 손잡고 거니는 길이 여좌천변에 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기다리는 길이 여좌천변에 있고,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는 길이 여좌천변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있고, 어머니의 당부가 있고,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그곳에 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여좌천이 있어 행복합니다. 간난했던 어머니의 일생은 험하고 거친 바다를 회유하는 연어의 삶이었습니다. 편안한 날보다 힘든 날이 많았고 배 부른 날보다 배 고픈 날이 많았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삶이 그러하듯 갇힌 물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제 몸으로 길을 만들며 살았습니다. 이젠 다행히 천변 거처에서 다시 평온하게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찾은 것 같습니다.

진해도시재생 사업인 ‘충무지구 도시재생 뉴딜’을 완성하기 위해 열심히 에스키스를 그리고 있습니다. 1926년에 개통된 진해역을 베이스캠프 삼아 제 고향 진해를 살리고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한창입니다. 저는 그 계획에서 여좌천만은 지금의 평화스러운 모습 그대로 남길 바랍니다. 여좌천과 로망스 다리로 몰리는 발길이 물길 따라 흘러가며 다양하게 분산되길 바랍니다.

천변도 길입니다. 물길도 길입니다. 저에게는 어머니도 길입니다. 누군가 길은 그릇이라 했습니다. 평면이 아니고 입체라고 했습니다. 제 유년의 기억 속에 진해는 골목길이 많았습니다. 그 골목들이 건축이란 이름으로 많이 사라졌습니다. 길이 사라지면 추억이란 이름의 흑백사진도 사라집니다.

다행히 여좌천은 여전히 흐르고 천변의 길은 이어집니다. 진해의 아이덴디티를 위해 여좌천변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길 바랍니다. 어머니가 앞장서거나 제가 앞장서거나 어머니와 제가 걷는 그 길은 그 정도면 족합니다. 건축가 김수근은 말했습니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고 했습니다. 제게 참 좋은 길 여좌천변, 지금 녹음이 무성해지고 있습니다.

시인·경남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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