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과 경남이 미래를 위해 손을 잡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그동안 두 지역은 부산항 신항 확장의 원칙에는 공감하면서도 그 위치를 두고 반목하다가 이제 손잡고 청사진을 함께 그리기로 했다. 참으로 훈훈하다.
타 지역에서는 두 지역의 갈등을 작명 문제로만 이해했다. ‘부산 제2 신항’이냐, ‘진해신항’이냐. 그 갈등의 실체는 새로운 시설을 가덕도 쪽으로 넓히느냐, 진해 제덕만 쪽으로 넓히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니까 단순한 작명의 문제가 아니라 항구의 미래와 실체를 둘러싼 대립이었다.
그렇다. 이름이 곧 실체다. 이름을 모르는 것은 존재를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통영 시인 김춘수는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시 ‘꽃’)고 하지 않았던가!
유감스럽게도, 부산 시민은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대범한’ 경향이 있다(외지 사람의 눈에는 그 대범함이 아주 강하다). 부산항에는 허치슨 우암 감만 신선대 등 고유한 이름을 가진 부두들이 있다. 심지어 중앙, 1, 2, 3, 4 등 현재 기능을 멈춘, 죽은 부두에도 이름이 있다. 그런데 정작 사람으로 북적이는 여객부두에는 이름이 없다. 국제여객, 연안여객, 국제크루즈 등을 이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름이 아니라 기능이다. 마치 어느 식당의 이름이 ‘식당’인 것과 다르지 않다. 물건을 실어 나르는 부두에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람이 주인인 부두는 이름도 없으니 여객부두들이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탄할 일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대범함인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부산항 앞의 아름답고 웅장한 다리의 이름은 ‘부산항대교’다. 그 다리를 바라보는, 죽은 부둣가는 ‘북항’이다. 발전의 상징일 때는 부산항이고, 재개발의 대상일 때는 북항이다. 살아서는 명태, 죽어서는 북어가 되는 꼴이다. 그래서 외지 사람들에게 부산의 명명법은 낯설고 어지럽다.
부산은행과 한국은행 부산본부는 부산국제금융센터(BIFC)에 입주한 기관이다. 그렇지만, 방문객에게 “BIFC로 오세요!”라고 했다가는 낭패다. 바로 옆 BIFC 빌딩 앞에서 화가 나 있는 손님을 모셔와야 한다. “저희는 BIFC에 있지만, BIFC 빌딩에 입주하지는 않았습니다”라는 이상하고 장황한 설명을 해야 한다. “다대포항은 부산항이 아니지만, 부산항의 하나입니다”라고 말할 때와 비슷한 곤혹감을 느낀다. 집합명사와 고유명사를 구분하지 않는 데서 오는 혼란이다. 부산이 유독 그런 경향이 강하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이름은 더는 해부될 수 없는 원초적 기호다(‘논리철학논고’). 이름이 곧 그 대상이다. 이름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흐트러진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조상들이 창씨개명에 그토록 분노했던 것은, 이름이 지워지면 더는 해부될 수 없는 원초적 자아 즉, 한국인의 혼이 사라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산에는 좌천동(佐川洞)이 있다.
향토사학자들은 좌천동의 유래가 옛날 그 지역에 흐르던 좌자천(佐自川)이라고 한다. 하지만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좌천동으로 고친 것이라 일본 색이 짙다. 그들에게 친숙한 일본의 지명과 성씨인 사가와(佐川)로 고친 것이다. 그들은 기장군의 좌광천(佐光川) 주변도 사가와(좌천)로 불렀다. 어쩌면 사가와 지역의 집성촌 사람들이 대거 이민 온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를 고려할 때 부산의 좌천역은 ‘좌자천역’으로 부르거나 ‘좌자역’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일제의 잔재를 답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산의 발전은 바른 명명법에서 출발한다. 산과 물, 다리와 항구의 이름을 주민들이 제대로 붙여주고 정성스럽게 불러야 외지 사람도 관심을 두지 않겠는가. 부산의 땅과 항구는 호소한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꽃’)라고….
참고로, 2004년 말 청와대에 새로 지어진 건물의 이름이 여민관(與民館)이다. 애초 신관(新館)으로 부르려던 계획을 마지막에 바꿨다. 당시 파견 직원이었던 필자가 이름과 기능은 구별해야 한다면서 제안했다. 부산에 잠시 근무하는 필자는 여민관보다 부산을 더 사랑한다.
한국은행 부산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