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수 한국 재벌이 총수 교체기에 있다. 1945년 해방 이후 자본주의 기업이 탄생했으니 한국 재계의 역사는 70년이 조금 넘는다. 대부분 한국 재벌은 3세 시대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물론 역사가 오래된 두산이나 LG처럼 이미 4세 총수 시대에 접어든 곳도 있다. 올해 공정위가 지정한 총수가 있는 자산 5조 원 이상인 대기업 51곳의 대표자를 보면 창업 세대는 17명, 창업 2세는 23명, 창업 3세는 9명, 창업 4세는 2명이었다. 총수 4명 중 3명은 이미 차세대로 경영권이 넘어갔거나 승계를 목전에 두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재벌은 총수 교체기만 되면 잡음에 시달린다. 물론 모든 재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재벌가에서 경영권을 두고 형제나 혈족 간 골육상쟁이 벌어진다. 심지어 두 세대에 걸쳐 낯 뜨거운 집안싸움을 벌이는 재벌가도 적지 않다. 오죽하면 재벌가의 분쟁을 두고 ‘돈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일까.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세습경영이 많다 보니 분쟁 사례도 많아 보인다.
우리나라 재벌가에서 경영세습 시기에 골육상쟁이 많이 벌어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총수에게 부여되는 무소불위의 제왕적 권한 때문이다. 총수에 오르면 절대군주처럼 누구도 견제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 기업의 지배구조다. 상법상 대주주나 총수를 견제하기 위한 장치인 이사회나 주주총회, 사외이사제도, 감사제도는 작동하기 어렵다. 총수가 기업 경영의 핵심인 인사와 재무를 장악하는 상황에서 제도적 견제 장치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회사 내 임직원들은 보신을 위한 줄서기에 몰두한다. 실제 재벌가 골육상쟁의 이면을 뜯어보면 ‘가신의 농단’이 숨어 있다.
총수와 측근 가신들의 밀실 경영도 골육상쟁을 촉발하는 원인이다. 경영권을 차지한 총수나 가신들이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형제나 혈족을 회사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막는 일이다. 경영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경쟁자를 사전에 제거하려는 의도다. 그러니 경영권에서 배제된 형제나 혈족은 선대가 남긴 재산 일부를 상속받아 배당으로 살거나 독자적으로 기업을 꾸리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폐족 취급을 당한다. 사정이 이러니 죽자 살자 경영권 쟁탈전에 나선다. 모든 것을 가지거나, 그것과 정반대인 단판 승부를 벌이는 것이다. 기업의 생존이나 발전, 주주나 투자자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다.
재벌가의 골육상쟁이 빈번한 또 다른 이유는 세대가 넘어갈수록 오너 일족 구성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30대 재벌그룹 총수의 배우자와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을 포함한 친·인척을 조사해보면 세대별로 평균 2.3배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쉽게 말하면 창업 세대에서 3세로 넘어가면 친·인척 수가 최소 4배 불어난다는 얘기다. 오너 일족의 범위가 넓어지니 당연히 가족 내부의 이해관계도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창업 2세까지만 해도 아들 중심의 장자상속 전통이 유지됐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기에 일부 재벌가에선 이복형제와 같은 복잡한 가족사까지 얽혀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골육상쟁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재벌가의 골육상쟁은 한국 기업의 신뢰도와 성장성을 저해한다. 경영권 분쟁의 난타전을 벌이는 과정에 회사 내부의 불법과 탈법 행태가 폭로되기 일쑤다. 지금까지 혈족 간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던 재벌기업치고 경영 비리와 관련된 내부 폭로가 없었던 경우는 드물다. 결국 수사기관까지 동원되어 회사 장부를 들쑤시니 해당 재벌은 최소 몇 년간 경영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경영인은 물론이고 임직원까지 불안에 떨며 우왕좌왕하니 문 닫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결국 재벌가의 골육상쟁을 차단하는 방법은 지배구조를 바꿔 기업과 주주의 이익을 제도적으로 견제하는 장치를 활성화하는 길밖에 없다. 더욱이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여 회사를 개인의 소유물로 좌지우지하는 경영 행태에 대한 외부 견제 장치도 촘촘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제대로 된 감독기관의 기업감시 체계를 구축하는 게 당연하다. 그것은 재벌을 옥죄는 것이 아니라 성장성과 사회적 이익을 증대시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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