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차 부산에 여행 온 벤과 루크는 모처럼 여유를 발걸음에 담아 여기저기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돼지국밥집이 눈에 들어왔고, 벤의 제안에 따라 둘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부딪힌 언어의 장벽. 국밥집 홀 담당 아저씨는 “Ha ha!” 웃으며 둘을 맞이했지만 자신의 입에서 “Ha ha” 말고는 영어가 나오지 않자 두 손님 앞에서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둘도 고픈 배를 잡고 아저씨만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두 친구의 점심 식사와 대한민국 소상공인 아저씨의 하루 매출에 차질이 생기는 듯 했으나, 다행히 두 테이블 건너에 차동욱 군이 앉아 있었으니 그는 수능 영어를 자그마치 2번이나 친 실력자였다. 조용히 식사를 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이를 기회삼아 글로벌 시대로 가는 출사표를 던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만 벅벅 긁고 있던 세 사람에게 다가가 단어 네 개를 외쳤다. 메이. 아이. 헬프. 유? 그러고서 그는 통역을 시도했는데, 아뿔싸! 벤과 루크가 하는 영어는 수능과는 너무 달랐고 차 군은 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말았다. 당황한 차 군은 자기가 맞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냥 종업원 아저씨께 돼지국밥 두 개를 달라고 말하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부족한 영어 듣기 실력을 한탄하면서, 두 외국인이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건지 떠올려보았다. 루크가 매운 건 빼달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루크 쪽을 슬며시 쳐다보았는데, 친절한 종업원 아저씨가 루크의 국밥을 양념장과 섞어주고 계셨고, 루크는 점점 빨개지는 국밥을 보며 어색한 웃음만 애써 짓고 있었다. 차 군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수육마저 남긴 채 식당을 나왔다.
그러고서 나는 내 영어 듣기가 뭐가 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고교 교육과정의 영어 듣기가 기초 수준에 불과한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고교 교육과 관련해 한 가지 소식을 들었는데, 몇몇 고등학교에서 고교학점제를 시범 실시 중이며 2025년에는 전국의 고등학교에 도입된다는 것이었다. 고교학점제란 고등학생도 대학생처럼 원하는 수업을 선택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난 이 제도에 찬성한다.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학생이 영어 듣기를 비롯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깊이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제대로 시행되려면 몇 가지 선결 조건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상대평가다. 상대평가에서는 학생들이 흥미 있어 하거나 실질적으로 필요한 과목보다는 점수를 따기 쉬운 과목을 듣는다. 의대 준비생들만 하더라도 의학에 필요한 화학, 생명과학이 아니라 점수 따기 쉬운 지구과학을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평가를 절대평가로 바꾸면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과잉 경쟁, 소모전을 막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원하고 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공부를 가능케 할 수 있다.
고교학점제는 선생님들의 업무 부담과도 관련돼 있다. 다양한 수업을 운영하려면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동영상’이라는 124년 된 기술을 이용하지 않으면 말이다. 영상 강의를 적극 활용하면 수업을 준비해야하는 부담에서 교사를 해방시킬 수 있고 학생은 학교에 없는 선생님의 수업도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인터넷이란 게 있어서 질의응답도 원격으로 가능하다. 사설 인터넷강의 업체도 한 달에 4만 원만 내면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던데 공교육은 왜 못 하고 있는 건지 솔직히 답답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 부담을 던 선생님들은 학생과의 상호작용에 더욱 힘씀으로써 교사로서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나는 고교학점제가 성공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자율성을 회복해 다원화되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배울 것을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이룩할 수 있으면 좋겠다. 국밥집 아저씨와 나는 늘어가는 외국인을 보며 영어를 공부할 수도 있고 사람들은 날마다 터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해 스스로 찾아보고 배우고 판단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적 자율, 능동, 책임, 표현이 견고하게 자리 잡은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동아대 의학과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