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원수지, 사람이 무슨 죄냐.” 술에 관대한 한국 사회는 이 한마디로 설명된다. 술자리에서 벌어진 실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게 미덕으로 여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법정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주취 범죄자의 변호인은 술에 취한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부각한다. 심신미약 상태가 인정되면 법정 형량의 절반까지 감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고인은 사건 당일 친구와 술을 마신 뒤 여자 기숙사 방향으로 간 이후 기억이 없습니다. 술이 깬 뒤에야 CCTV와 친구·피해자 증언을 종합해 상황을 파악할 정도였습니다. 평소에도 술을 마시면 ‘블랙아웃’ 현상을 겪었는데, 이날은 주량 이상으로 마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을 참고해주길 바랍니다.” 지난해 12월 부산대 여자 기숙사에 몰래 침입한 뒤 계단에서 만난 여학생에게 성폭행을 시도하고 주먹을 휘두른 혐의(강간 등 상해)로 기소된 A 씨의 변호인도 최종변론에서 사건 당시 A 씨의 블랙아웃 상태를 거듭 강조했다. 부산지법은 최근 이 같은 변론을 받아들여 “A 씨의 심신미약 상태가 인정된다”며 여러 사정을 검토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2017년 부산지법이 모텔에서 만취한 상태로 여성을 성폭행한 남성에 대해 “음주로 인한 블랙아웃 증상은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일 뿐이고, 피고인이 주취 상태를 자초한 이상 심신미약에 따른 형의 감경을 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며 피고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판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주취 감경을 놓고 법원의 판단이 들쑥날쑥한 것은 성범죄 특례법이 ‘음주에 따른 심신장애 상태에서 성폭력 범죄를 범한 때에는 감경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재판부 재량에 맡기고 있어서다. 법원의 일관되지 못한 판결은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A 씨 선고 이후 지역 여성단체는 “상식을 벗어난 판결”이라며 비난 성명을 냈다. 이러한 국민 여론을 반영해 대법원은 최근 긴급하게 음주 관련 심신미약 범죄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역 결과를 양형에도 반영한다는 방침이다. 영아를 강간·상해한 이른바 ‘조두순 사건’ 이후 들끓었던 주취 감경 폐지 목소리가 얼마나 반영될지 주목된다. 술은 잘못이 없다. 취한 사람이 문제다. 법에서조차 그 잘못의 책임을 술에 떠넘겨선 안 될 일이다.
사회부 shcho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