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종(種)이 서로 생존이나 번식에 영향을 미치면서 진화하는 현상을 공진화(共進化 · coevolution)라 합니다. 포식자와 피식자, 기생자와 숙주, 경쟁자끼리의 공진화는 한쪽 종의 적응적인 진화가 다른 쪽 종의 대항적인 진화를 일으킵니다. 또 공생자끼리의 공진화는 한쪽 종의 적응적 진화가 다른 쪽의 협조적인 진화를 일으키는 것이죠. 이를테면 상호 영향을 미치는 꽃식물 종과 그들의 꽃가루를 매개하는 곤충은 서로 효율성이 높은 쪽으로 진화하여 종의 다양화에 크게 이바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공생자만이 아니라 경쟁자까지도 진화에 영향을 미쳐 생존력을 높여주는 자연현상을 생각하면 같이 진화하기보다 오히려 함께 퇴화하기를 일삼는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모습이 더욱 실망스럽고 우려스럽습니다.
걷는 모양 다 같다면 무슨 재미있을까?/또박또박 걷는 사람 건들건들 걷는 사람/
걸음새 서로 달라서 어울려 살 만하다.
(졸시 ‘공존’ 전문)
사람들의 걷는 모양이 모두 똑같다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나요? 또박또박 걷는 사람, 뚜벅뚜벅 걷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건들건들 걷는 사람, 간들간들 걷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벚꽃이 아무리 보기 좋은 봄이라 해도 사방천지에 벚꽃뿐이면 어떨까요? 매화도 피고 살구꽃도 피고 진달래, 개나리, 민들레, 별꽃, 제비꽃도 피어야 진정 봄다운 봄이라 할 수 있듯 사람 사는 세상도 결국 사람들의 ‘걸음새’가 ‘서로 달라서 어울려 살 만한’ 거지요. 숲이 공진화를 통한 종의 다양성으로 더욱 건강한 숲을 이루듯 우리 사회도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받아들 때 더욱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왼손은 오른손을 씻고/
오른손은 왼손을 씻는 법이다//
손바닥은 손등을 씻고//
손등은/
손바닥이 데려가 입힌 때를/
다른 편 손바닥에/
기꺼이 맡기는 법이다//
손에서 손까지의 거리/
손바닥에서 손등까지의 거리//
서로 마주치지 않으면/
죽어도 씻을 수 없는 거리가/
가슴 아래 같은 체온으로 매달려 있다.
(류근 시 ‘손 씻는 법’ 전문)
류근 시인의 시 ‘손 씻는 법’은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생각입니다. 하지만 내가 내 손을 씻고 살아가면서 ‘왼손은 오른손을 씻고/오른손은 왼손을 씻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이 짧은 구절에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이치가 다 들어 있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사용자와 노동자, 갑과 을, 여와 야의 관계를 다 함축하고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인정과 배려, 그리고 고마움으로 ‘왼손은 오른손을 씻고/오른손은 왼손을 씻는’ 것처럼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아 서로를 씻겨줄 때, 누구든 가슴을 열고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을까요? 공존은 결국 공감에서 온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君子(군자) 和而不同(화이부동), 小人(소인) 同而不和(동이불화)”라고. 즉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고 획일적이지 않으며, 소인은 획일적이고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군자는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지만, 소인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똑같기만을 요구해 어울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시대는 외적 강제와 억압이 줄어들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라고 하는 데도 왜 우리는 획일적인 가치와 판에 박은 듯한 삶의 형태에 갇혀 쉽게 벗어나지 못할까요?
모든 ‘다른 것’은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다른 것’이 한층 더 큰 힘을 얻으려면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고 공감해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무조건 내 편만 옳다고 우기는 우리나라 의원님들께 한 가지 제안합니다. 의정활동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번 주말엔 종의 다양성으로 더욱 기운이 펄펄 넘치는 5월의 아침 숲길을 걸으며 숲의 공감 능력을 배우고 몸으로 익혀보시라고.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