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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밀양의 마음 /박형준

해천의 의열기념관, 北정권 수립 참여한 김원봉 흔적들 지워

가치·이념은 달라도 항거 정신 기억돼야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5-29 18:52:10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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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경남 밀양으로 향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의 항일 정신이 깃든 장소를 답사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만세운동 사적지와 항일 유적지가 적지 않은데도, 굳이 밀양을 찾은 것은 지난해 매우 의미 있는 역사공간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 들어선 ‘의열기념관’이 그곳이다.

영화 ‘암살’(2015)과 ‘밀정’(2016)에는 공통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의열단의 약산(若山) 김원봉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민족 해방을 위해 의롭게 자기 몸을 투탄하는 청년 의열단원의 절의와 희생정신은 식민 통치자의 골머리를 아프게 한 ‘공포의 무기’였다. 단장 김원봉은 3·1운동 이후 일본 경찰과 군인, 친일 부역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의열단의 수장이자 광복군의 부사령관이다.

약산의 생가 터에 건립된 ‘의열기념관’은 김원봉뿐 아니라 김대지, 황상규, 한봉근, 이종암, 이성우, 김상윤, 윤세주와 같은 의열단원의 숭고한 희생과 저항 정신을 기리고 있다. 특히 기념관 옥상에 오르면 김원봉의 평생 동지였던 석정 윤세주의 생가 터를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두 사람의 ‘의열(義烈) 정신’을 키워낸 밀양의 충직한 기운을 마주하고 있으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해천 인가에는 김원봉과 윤세주 외에도 독립운동가 이장수, 전홍표의 생가지가 있으며, 또한 몇 걸음 더 걷는 수고를 보태면 고인덕, 김대지, 김병환, 윤보은, 윤방우, 윤치형, 정동준 등의 독립지사 생가 터도 만날 수 있다. 수많은 항일지사를 낳은 명당 해천은 과거 밀양읍성을 따라 조성된 방어용 해자로, 최근 ‘항일운동’의 흔적을 스토리텔링하며 새롭게 복원된 역사공간 콘텐츠이다.

이런 항일운동테마거리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곳이 ‘의열기념관’이다. 그러나 75명에 이르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 수훈자의 명단에는 정작 의열단장 김원봉의 이름이 빠져 있다. 왜 그럴까? 1948년에 월북해 북한에서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등을 역임하였다는 게 이유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이념적 노선 때문에, 일제 심장에 폭탄을 던진 ‘의로움’마저 소거하는 것은 지나치게 경직된 사고이다.
기념관의 전시 문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의열단의 최고 이상은 네 가지이다. 첫째 ‘구축왜노’(왜적을 몰아낸다), 둘째 ‘광복조국’(조국을 되찾는다), 셋째 ‘타파계급’(계급을 없앤다), 넷째 ‘평균지권’(토지를 고루 나눈다). 의열단은 민족주의와 계급주의를 기반으로 식민제국의 착취와 수탈에 맞서 싸운 항일 조직이다.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 로버트 J. C. 영에 따르면,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통한 반외세 투쟁은 1920년대 탈식민주의 운동의 세계사적 흐름이다. 반식민의 관점에서 민족주의와 국제적 사회주의는 공통의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다.

김원봉은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 통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며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의 해방 후 행적이 일제강점기 민족 해방 투쟁의 역사를 무효화시킬 수는 없다. 월북 이후 행적에 대한 공과는 별개로 따지더라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청춘을 바친 이의 숭고한 삶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약산 김원봉의 아내인 박차정 의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밀양시 부북면에 있는 박차정의 묘는 거의 방치되어 있다시피 했다. 기미년 만세운동 100주년을 전후로 뜻있는 분들의 마음이 모여 조금은 정비가 된 듯하나, 그녀의 묘소로 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하고 가파르기만 하다. 비가 오는 역사문화 탐방길, 누군가 손수 그려 만든 이정표를 따라가는 발이 자꾸만 진창 속으로 빠진다.

물론, 동족 간에 총구를 겨눈 한국전쟁의 적대적 트라우마와 냉전 대결의 상처는 전후세대의 통념보다 훨씬 더 깊고 아프다. 정략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약산의 서훈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설득하고자 하는 노력 역시 경주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항일운동테마거리가 끝나는 ‘남문공연장’에서 보면 독립운동가의 많은 생가지는 해천의 왼편(左)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거꾸로 테마거리 입구인 ‘진입 광장’에서 바라보면, 항일투사의 집터는 대부분 해천의 오른편(右)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제는 좌우의 분별이 아니다.

밀양의 마음은 오직 ‘한길’이다. 가치와 이념은 달라도, 일제의 속박과 착취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항거의 심상(心象)’은 결코 다르지 않다. 기미년에만 여덟 차례의 만세운동이 융기한 밀양이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투쟁의 장소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폭압적인 제국의 신민·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신념 아래, 안정적인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선 순수한 영혼의 고된 항거를 오래된 이념의 푯대로 갈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로운 정신의 고장, 밀양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역사, 아니 마음이다.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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