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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감성터치] 엄마의 콩깍지 /허소희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5-12 19:36:55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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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했다. 그러니까 원룸에 딸린 한 칸짜리 옷장에 사계절치의 옷을 다 채워 넣었다는 뜻이다. 가족에게 원룸 보증금에다 첫 달치 월세까지 스스로 마련했다며 큰 소리를 떵떵 쳤건만, 이불 보따리를 안고 기차에서 내리는 엄마를 볼 때는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이사 날짜가 정해지고 엄마는 딱 하루 슬퍼했다. 설거지를 하던 엄마는 저 멀리 경기도에 있는 회사에서 왜 부산 애를 뽑아서 멀리 가야 하냐고 물었다. 요즘은 블라인드 채용이라 고향이나 학교 이름 같은 걸 안 봐서 그래. 엄마 마음을 모르는 척 다른 답을 했다. 니는 입만 떼도 부산 사람인 거 다 알 텐데…. 추위를 잘 타는 애가 거기서 어찌 산다는 말이고…. 나는 못 들은 척 말을 삼켰고, 엄마의 목소리가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에 묻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엄마는 밤 사이에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날이 밝자 진군하는 장군처럼 마트며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엄마의 쇼핑 리스트는 배꼽까지 덮이는 면 100% 팬티부터 빨아 쓰기 편한 행주까지 광범위했고, 조금의 얼룩이 묻어도 카트에 담지 않고 꼼꼼하게 물건을 살폈다. 나의 첫 번째 독립 지휘권을 엄마에게 뺏긴 듯했지만, 엄마의 마음이 편하다면 그냥 맡겨도 좋겠다 싶었다.

사실 내 몸이 편해서였다. 어지럽게 마트를 돌며 가격비교를 하지 않아도 되고, 에스컬레이터를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세제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을 최대한 미루고, 원룸의 화장실 선반이며 부엌 찬장에 면봉이나 행주 따위가 절묘하게 놓여 있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고작 내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건 그런 거였다.

네 식구가 기차로 실어 나른 이삿짐은 옷장 하나와 서랍장 두 개, 그리고 한 칸짜리 부엌 찬장을 가득 채웠다. 출근용 구두며 손바닥만 한 일기장 같은 부산에서의 일상이 그대로 옮겨졌다. 여기다 엄마가 꼬박 이틀 동안 준비한 물건들을 펼치자 5평짜리 방이 부엌 침실 베란다 현관으로 깔끔하게 나눠졌다.

싱크대 아래에 주방용 매트를 깔자 그 주위는 나름 부엌이 되었고, 엄마가 손수 햇볕에 말려온 이불을 펼치자 그곳은 더할 나위 없는 침실이 되었다. 가스레인지 옆에는 키친타월, 화장대 옆에는 미용티슈, 화장실에는 두루마리 휴지가 정확하게 놓였다. 그리고 냉장고 위에는 라면과 건미역이 얼마간의 양식으로 자리해 자취 생활의 시작을 알렸다.

모두 떠난 방, 홀로 밤을 보냈다. 어김없이 아침이 왔고, 햇빛은 비싼 월세만큼 넉넉히 들었다. 적재적소에 놓인 소소한 물건들 덕분에 허둥지둥하지 않고, 씻고 입고 먹는 일상을 공백 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엄마가 부려놓고 간 살림들은 헨젤과 그레텔의 빵 부스러기처럼 새로운 포문을 여는 이정표가 돼 주었다.

이 모든 것이 엄마의 손길 아래 탄생했다. 서른 살 넘은 딸내미가 아직 아기처럼 보이는 엄마의 콩깍지 덕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사를 마칠 수 있었다. 스무 살 무렵에 떠나왔다면 서툰 모습마저 청춘의 한 부분이 되었을 텐데, 나이 꽤나 먹고 엄마에게 포장이사를 맡기는 꼴이라니 부끄러웠다.

딸에게 엄마는 텅 빈 방에 익숙한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으로 응원했다. 낯선 동네에서 겁먹지 않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시작하라는 무언의 지지였다. 옷에 양념이 튀면 주방 세제를, 화장품이 묻으면 폼클렌징으로 씻어내라는 엄마의 당부는 일상의 얼룩을 지워내는 힘을 키워줄 것이다.

정작 원룸 계약이 끝나고 이곳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을 수도 있다. 헤프게 쓰는 티슈처럼 엄마가 공들여 놓고 간 세간들이 해지고 쓸모를 잃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엄마가 구석구석 심어놓은 온기는 방 한편에 남아 작은 방을 덥히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생각하는 가장 깊은 마음이 두고두고 도와줄 것임을 믿는다. 엄마의 콩깍지는 이제 든든한 거름이 될 것이다. 새로운 대지에 씩씩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제 나의 성긴 줄기로 기꺼이 내일을 지탱하려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귀한 잎사귀를 틔워낼 날을 그려본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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