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북 익산시의 초청으로 팸투어를 다녀왔다. 팸투어는 언론사 기자 등이 지자체의 초청을 받아 관광지를 탐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익산시 초청 팸투어에는 시인, 소설가, 국어학자 등이 함께했다. 문학인들은 창작의 모티프를 얻을 수 있고, 국어학자들은 방언의 용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서 참여자들의 기대가 컸다. 특히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2015년 7월 독일의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됐다. 익산 시민들은 익산을 ‘백제 왕도(王都)’라고 칭했다.
나는 예전부터 미륵사지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미륵사는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음이 그동안 밝혀졌다. 백제 무왕에 관한 얘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사 창건설화가 실려 있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그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출현했다. 부인이 그곳에 큰 절을 지어줄 것을 무왕에게 청했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어 금당과 탑, 회랑을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했다.
백제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사모하여 ‘서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인물이다.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마를 캐서 팔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서동요는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이 노래가 널리 퍼지자 왕은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게 되고, 서동이 기다리고 있다 선화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돌아가 본인은 왕이 되고 선화공주를 왕비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이 회랑으로 구획돼 각각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미륵사의 큰 특징이었다.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서원(西院)에 위치한 석탑으로 반파된 상태로 남아 있다가 최근에 복원됐다. 중원의 탑지는 목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동원의 석탑은 1992년 9층 석탑으로 복원됐다. 아주 넓은 절터에 서서 나는 가만히 부는 한 자락의 바람을 보았다. 그리고 한 시대의 성쇠(盛衰)를 보았다.
쌍릉과 왕궁리 유적지 내 세워져 있는 오층석탑도 둘러봤다. 특히 왕궁리 유적지에는 벚꽃이 만개해 많은 시민으로 붐볐다. 오층석탑 둘레를 탑돌이하고, 백제인의 옛 의상을 입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밤 시간에는 유적지를 천천히 걸어가며 옛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는 야행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시민의 호응이 좋았다.
고도리에 있는 석불 입상을 봤을 때의 기쁨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200여 m의 간격을 두고 두 석불 입상이 마주보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손과 옷, 얼굴의 생김새를 아주 간략하게 표현해 놓았다. 가늘게 뜬 눈이며, 작은 입가에 엷게 번지는 미소, 낮은 코, 갸름한 얼굴의 선(線) 등이 인상적이었다. 팸투어에 동행한 안도현 시인은 이 석불 입상들을 본 소회를 일찍이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이라는 시에 담았다.
‘내 애인은 바위 속에 누워 있었지 / 두 손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지 / 누군가 정(釘)으로 바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렸지 / 내 애인은 문을 밀고 바깥으로 걸어나왔지 / 바위 속은 환했지만 바깥은 어두웠지 / 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정으로 석불 입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사랑의 발견에 빗댄 작품이었다. 또한 누구든 제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을 그리운, 단 한 사람을 떠올려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팸투어 기간 열린 간담회 자리에서 나는 안도현 시인의 이 작품이 고도리 석불 입상을 널리 알리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밝히기도 했다.
익산 팸투어를 하면서 잠깐 들른 가람 이병기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도 인상적이었다. 생가의 탱자나무 아래에 오래 서 있기도 했는데 수령이 200년이 넘었다고 했다. 정자를 지었고, 연못을 팠으며, 슬기를 숨기고 겉으로 어리석은 채 한다는 뜻으로 사랑채 이름을 ‘수우재(守愚齋)’라고 지었는데 국문학자이면서 시조시인이었던 이병기 시인의 인품을 느낄 수 있었다. 술과 제자, 난초라는 세 가지 복을 타고 났다고 스스로 말했던 가람 이병기 시인.
시인 정지용이 소설가 이태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가람 선생께서 난초가 피었다고 22일 저녁에 우리를 오라십니다. 모든 일 제쳐놓고 오시오. 청향복욱(淸香馥郁)한 망년회가 될 듯하니 질겁지 않으리까”라고 썼을 정도였다. 풍류객이요 선비요, 교육자였던 이병기 시인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시비에 새긴 ‘창(窓)’이라는 시조를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우리 방으로는 창(窓)으로 눈을 삼았다 / 종이 한 장으로 우주(宇宙)를 가렸지만 / 영원히 태양(太陽)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 너의 앞에서는 술 먹기도 두렵다 / 너의 앞에서는 참선(參禪)키도 어렵다 / 진귀(珍貴)한 고서(古書)를 펴어 서권기(書卷氣)나 기를까 / 나의 추(醜)와 미(美)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 나의 고(苦)와 락(樂)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 그러나 나의 임종(臨終)도 네 앞에서 하려 한다.’
팸투어를 다녀온 후 나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더러는 이런 기획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한 지역의 지형과 역사, 유적지, 복식과 음식, 인심과 지방어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탐방의 경험을 글 쓰는 이들이 작품 생산으로 이어간다면 지역을 알리는 데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남해 금산이나 영주 부석사, 울산 반구대 암각화, 담양 소쇄원, 섬진강변 진메마을, 순천 와온해변 등은 시와 소설 작품을 통해 일반인에게 더 잘 알려진 경우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인문학을 등한시하는 시대에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초청해 오랜 시간이 쌓인 곳들을 두루 살펴보게 해준 익산시의 기획은 신선했다. 감흥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