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쁜 꽃이 피고 지는 봄이 한창이다. 이런 4월을 잔인하다고 읊은 시인도 있다. 우리에게도 4월은 아픔이 있는 달이다. 세월호다. 죽음과 관련해 종교 및 철학자들이 말하고 있고, 범부들도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관련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든 세월호에 희생된 우리 아이의 죽음이 비극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 철학자는 죽음을 1, 2, 3인칭으로 분류해 의미를 설명한 사람이 있다. 1인칭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기에 인지할 수 없다. 3인칭의 죽음은 나와 무관한 남의 죽음이다. 해서, 안 됐다는 정도로 인식할 뿐 사실 나에게 와 닿지 않는다. 2인칭의 죽음은 너의 죽음이다. 나와 교감하던 사람의 죽음이다. 이러한 2인칭의 죽음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경험하게 된다.
국가나 사회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다. 공동체를 위해 협력하면 기꺼이 나를 보호해준다는 믿음 말이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나의 이익을 나누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친다. 같은 공동체라는 것은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이고 그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니며 공동체 구성원의 불행한 죽음도 나와 무관한 3인칭의 죽음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의 죽음으로 여기고 안타까워하며 이러한 태도를 공감이라 한다. 공동체 구성원의 슬픔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은 곧 나의 일이 된다. 세월호는 이러한 공감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인간의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슬픔이고 비극이지만 말이다.
세월호 유족들을 향해 차마 인용하기조차 부끄러운 막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그가 도대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뭘로 보는지. 국민의 생명을 무시하는 정부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인지. 그 말을 한 사람과 같은 정당의 어떤 사람은 ‘막말로 유족들에게 아픔을 드렸다면 유감’이라고 말한다. 유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차지 않아 못마땅하고 섭섭한 느낌’ 이다. 어디에도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뜻은 없고 오히려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뿐이다. 즉 그런 일을 왜 벌여가지고 성가시게 하느냐는 말이지 사과의 의미는 아니다. 세월호가 안전불감증에 대해 경종을 울린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났을 때의 대응이 잘못됐다는 데 있다. 아무리 철저한 대비를 해도 사고 확률을 줄일 수 있겠지만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해서, 사고가 일어난 것을 가정하여 이런저런 훈련이나 연습을 하지 않는가.
세월호가 피할 수 없는 사고이고 그 때문에 우리 아이가 잘못되었다면 이렇게까지 부끄럽고 미안하고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피지도 못하고 지금껏 살아 있다면 이 화려한 봄을 즐겼을 아이들을 그때 살릴 수 있었음에도 그러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왜 이들을 구하지 못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적지 않다. 왜 대피명령을 내리지 않았는지, 만약 내렸다면 왜 전달되지 않았는지, 언론은 왜 사실이 아닌 보도를 했는지 등등에 관해 누구의 처벌 여부를 떠나 사실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이러한 슬픔이 없을 테니까. TV에 나온 학생 어머니 한 분이 더는 미안해 하지 말고 행복하게 지내다가 자신들이 힘들 때 손잡아 달라고 말하던데, 이런 분들을 돈 때문이라고 조롱한 사람들이 있다니.
왜 우리는 이 정도의 나라밖에 못 만들었을까. 세월호에 발목 잡히지 말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자거나 이제 그만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데 뭘 더 나아간다는 말인가.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이보다 더 시급한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수백 년 전 조상의 제사는 매년 지내면서 우리 책임으로 보낸 애들을 기억하는 게 지겹다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역지사지’가 무슨 뜻인지 묻고 싶다.
그나저나 우리 아이들은 하늘나라에서는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어야 할텐데.
변호사·법무법인 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