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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무기의 그늘 /이경식

트럼프, 무기 판매 열중…한반도 비핵화와 모순

탈냉전 난제 수두룩하나 확실한 진실부터 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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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당혹스러운 점이 적지 않았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회담의 성격. 트럼프 대통령의 모두발언만 보면 북미대화 관련 회담인지, 무기 매매 회담인지 헷갈린다. 북한보다 우리나라의 미국산 무기 구매에 대한 언급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장비를 구매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미국은 미국 장비를 구매하는 나라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발언의 마지막 말까지 무기 판매에 할애했다. 이를 미루어 그의 관심은 하노이 정상회담의 결렬로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대화보다 무기 판매에 쏠려있는 듯했다. 공들여 준비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도 제쳐놓고 미국으로 날아간 문 대통령을 생각하면 마음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방위산업계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 발언을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산 무기 구입 제의로 본다. 공개 석상에서 못 박듯이 말해 상대가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런 무기 판매는 한미 간에 선례가 있었다. 2017년 11월 우리나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때였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산 무기를 구입해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담 직후 “100억 달러 이상의 첨단무기를 팔았다”고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결국 지난해 미국 보잉의 해상초계기 ‘포세이돈’ 6대(1조9000억 원)를 구매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아파치헬기 전자전기 등 10여 종, 10조~15조 원어치에 이르는 미국산 무기를 구매하게 될 것으로 업계는 전망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3대 무기 판매처 중 하나다. 세계 방산시장 연감에 따르면 한국은 2008~2017년 미국에서 67억3100만 달러(7조6000억 원)의 무기를 구매했다. 사우디아라비아(106억3900만 달러)와 호주(72억7900만 달러)에 이어 세계 세 번째 미국산 무기 수입국이다. 무기 수요는 군사적 적대 정도와 비례한다. 수요가 많다는 것은 적대가 그만큼 심하다는 뜻이다. 핵과 재래식 전력을 모두 동원해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겠다는 한미 정상의 2017년 공동발표문에서 그 단면이 드러난다. 그렇게 깊어진 적대는 미국산 무기 구입을 늘리는 요인이 됐다. 한반도 냉전체제가 만든 ‘무기의 그늘’인 셈이다.

냉전 70년, 이제 무기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해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남북·북미 화해 무드로 여건도 차츰 무르익어간다. 아직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을 작성하진 못했지만, 6·12 북미공동성명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완전한 비핵화 합의를 통해 탈냉전의 비전을 제시했다. 4·27 판문점선언과 이를 구체화한 9월 남북평양선언은 사실상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고 점진적 군축으로 이끌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을 자신의 주요 치적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된 건 이런 변화 덕분이다.

하지만 진전은 거기까지다. 트럼프 대통령의 모순된 행태에 막혀 더 나아가긴 어렵다. 비핵화와 평화를 거론하면서 무기 판매에 열중한다면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북한과의 갈등도 불가피하다. 최근 조선중앙통신이 우리가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F-35A를 구입한 데 대해 “조선반도(한반도) 정세를 긴장 격화로 몰아가는 엄중한 도발행위”라며 비난하고 나선 건 예사롭지 않다. 안 그래도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북미대화에 악재를 하나 더 추가하는 꼴이다. 미국이 북한에는 핵·미사일은 물론 생화학무기까지 폐기하는 ‘포괄적 비핵화(빅딜)’를 요구하면서 우리에겐 군축 흐름을 거스르며 무기를 판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가뜩이나 힘든 비핵화 협상에 재를 뿌리는 처사나 다름없다.

빅딜 주장은 미국 방산업체들의 이익과도 무관치 않다. 빅딜은 먼저 비핵화한 뒤 대북 제재를 해제하겠다는 것으로, 카다피 정권을 몰락시킨 ‘리비아 모델’과 같다. 6·12 북미 정상회담 전 ‘네오콘(신보수주의)’의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북한에 이 모델을 제시했다가 회담이 무산될 뻔했다. 이번에 하노이회담에서 북한에 빅딜을 제안한 인사 역시 볼턴이다. 그는 북한과의 협상은 불필요하며, 현재 진행 중인 북미 협상 또한 깨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가 빅딜을 제안한 건 북한의 거부로 협상이 붕괴되는 상황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한반도 냉전체제는 유지되고, 방산업체들은 종전처럼 무기를 계속 팔 수 있게 된다.

무기의 그늘 탈출을 막는 장애요인은 도처에 있다. 네오콘, 방산업체 경영자에서부터 가장 자본주의적인 대통령인 트럼프까지. 이들은 이리저리 엮여 거대한 기득이권을 구축하고 있다. 불가능한 싸움인 것 같지만 포기할 순 없다. 우선 확실한 진실부터 하나씩 사수해나가는 게 좋겠다. 모든 무기와 폭력은 거부한다는 평화주의는 어떨까.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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