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는 수영에서 둘러볼 만한 게 많구나.”
부산 수영구 수영동 일대 좌수영성지를 다룬 ‘부산을 보행친화 도시로’ 연재물 ‘수영 좌수영성지길’(국제신문 지난 3월 15일 자 6면 보도)을 접한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좌수영성지의 다양한 콘텐츠를 품은 수영사적공원 일대 코스를 소개한 것인데, 다소 의외라는 투였다. 그렇게 풀어놓을 이야기보따리가 많으냐는 거였다. 지면 관계상 제대로 담지 못한 게 많았다고 답해줬다.
수영사적공원은 익히 알려진 곳이다. 임진왜란과 얽힌 좌수영성지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지금의 수영사적공원 일대에 관한 소개는 지극히 ‘평면적’이다. 과거 있었던, 해당 유적과 관련된 사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밋밋하기 짝이 없다. 생동감도, 감동도 덜하다. 사실관계 나열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는 이야기의 박제화로 연결된다. 텍스트 자체에만 치우친 결과다.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힘이다. 스토리텔링이란 글과 이미지 등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는 것이다. ‘story’와 ‘tell’의 ‘이야기를 하다’가 ‘ing’라는 현재진행형 의미를 담고 있다. 상호작용의 모양새도 포함된다. 말한다는 것 외에도 시청각과 후각, 촉각 등까지 동원된다. 이를 아이디어로 삼아 부산 기장 오감도(五感道)라는 낭만적인 이름도 등장했다. 기장의 해안길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만져볼 수 있는 등 다섯 가지 감성과 추억, 스토리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장에 나가보자. 좌수영성지 남문 앞에는 그림 안내판이 서 있다. 본래 옛 좌수영성이 어떤 모양으로 포진해 있었는지, 지금의 좌수영성지 남문 앞쪽이 관아거리인데, 동문거리로 연결된다는 점, 좌수영성의 4대문 위치는 어디였는지 등을 알려준다. 그런데 서문 터는 그렇다 치고 안내판으로는 남문과 북문, 동문 자리가 정확하게 어디였는지 알 도리가 없다. 지금의 건물 이름이라도 표시해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또 입간판 옆에는 우물 터라고 해서 우물을 복원해 놓았으나, 좌수영성 안에 있던 3개의 큰 우물 중 하나인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우물을 복원해 놓았을까. 사실관계를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흥미를 유발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이야기의 전달이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좌수영성지길을 취재하던 중 25의용단에 ‘꽂혔다’. 이는 스토리텔링이 뒷받침된 결과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간 좌수영성은 왜군의 세상이었다. 임란 초기 장수는 도망치고 군사도 뿔뿔이 흩어진 마당이었다. 약탈과 살육이 자행됐다. 결국 남은 수군과 성민 25명이 죽기를 각오하고 맞섰다. 이들은 ‘싸우면 이겨서 살 것이요, 싸우지 않으면 망하리로다’라며 피로써 맹세했다. 그 맹세의 자리가 무민사 뒤편의 큰 바위, 일명 선서바위였다고 한다. 무민사는 고려 말 왜구를 크게 무찌른 최영(1316~1388) 장군 영신을 모신 사당이다. 무민사는 수영현대아파트 관리사무소와 가까운 주택가 골목에 있는데,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지금 무민사 안내판에는 ‘25의용’이야기도 없다. 고려 말 왜구를 무찌른 최영 장군, 그리고 임란 때 왜적에 맞서 유격전을 펼친 25명의 용사, 이들이 피로써 맹세한 바위…. 이만한 스토리텔링도 없을 듯하다.
화제를 바꿔보자. 부산시가 ‘천릿길’을 연다고 한다. 갈맷길 700리를 재정비하고 여기에다 도심 보행길 300리를 추가하는 사업이다. 이와 관련한 ‘부산 도심 보행길 조성 마스터플랜 수립 용역’ 착수 보고회가 열렸다. 지난 9일에는 100억 원이 투입되는 도심 보행길 조성 사업 계획도 발표됐다. 부산형 테마거리 4곳과 ‘탁 트인’ 도심 보행길 6곳, ‘걷고 싶은 동네 한 바퀴’ 마실길 4곳을 조성하는 게 골자다. 부산진구 서면 근대산업유산 탐방길, 동래구 사직야구거리 탐방로, 남구 평화의 길 탐방로, 수영 나들길 등이 테마거리 조성 사업 대상. 보행길 사업 대상은 서구 근대역사 흔적길, 영도구 해양역사 생태탐방길, 해운대구 역사·문화 송정 옛길, 사하구 감천문화마을 탐방길, 사상구 삼락천 생태탐방길 등이다.
관건은 콘텐츠다. 일단 길을 걷는 자체에 재미를 붙일 수 있어야겠지만, 현재 도심 보행길 여건은 녹록지 않다. 도심 보행길을 취재하면서 늘 느끼는 점이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을 제대로 입히면 얘기가 달라진다. 도심 보행길이 ‘살아난다’. 이는 국제신문이 진행 중인 ‘부산을 보행친화 도시로’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더욱이 천릿길의 7할을 차지하는 갈맷길은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는 경쟁력의 우위로 직결된다. 이번에 새로 단장하는 부산의 도심 보행길마다 이야기를 잘 녹여냈으면 한다. 오는 12월 ‘부산의 길 콘테스트’를 통해 평가받을 도심 보행길의 성적표가 벌써 궁금하다.
편집국 부국장, 걷고싶은부산·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i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