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대마도를 1박 2일로 다녀왔다. 부산에서 지척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해외여행이었다. 이국적 풍광과 특유의 땅 내음, 바다 내음을 맡고 왔다. 하지만 구경거리는 많지 않았다. 귀국해도 뇌리에 맴도는 기억이 별로 없다. 단 하나만 빼고.
식당 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도로에 접어들기 위해 깜빡이를 켜면 거의 예외 없이 지나가던 차들이 멈추고 기다려 준다. 마치 “저는 급하지 않아요”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다. 도로를 달리다 차선 변경을 위해 깜빡이를 켜면 뒤에 오던 차들이 속도를 줄이면서 양보해 준다. 섬마을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순박해서일까.
대마도를 다녀온 후 우리 사회는 배려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익집단 사이의 대립이 너무 극단적이고 감정적이다. 마치 불구대천지 간처럼 보인다. 그런 각박함 때문일까. 작은 일에 소홀하고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도로에서 양보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이다. 앞차가 깜빡이를 켜면 뒤에서 오는 차들은 오히려 속도를 올린다. 마치 다른 차선을 앞서 진행하는 차량들이 자신의 차선 앞으로 들어오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다. 잠시 속도를 늦춰 앞차가 안전하게 차선 변경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도 무슨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빌딩의 현관문을 밀고 나갈 때 뒤따르는 사람이 있건 말건 밀었던 문을 내팽개치고 간다. 방심한 뒷사람이 가끔씩 다치거나 놀란다. 그렇게 하는 대신 뒷사람을 배려해 열린 문을 잠시 잡고 있거나 천천히 놓으면 되는데 말이다.
대의명분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매일 정의가 외쳐지는 시대이다. 미디어는 온갖 거대담론을 쏟아낸다. 그러나 그런 만큼 과연 세상이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거대한 움직임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작지만 많고 지속적인 움직임이 세상을 바꾼다. 인생을 바꾸려면 습관을 바꾸라고 했다. 그 작은 습관 중의 하나가 배려이다. 배려는 상대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나의 행위로 상대가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 적어도 나의 행위로 상대가 불편하거나 괴로워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배려의 기본이다. 그러나 배려가 그리 쉽지는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는 배려에는 의무나 책임의 느낌이 많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론은 장애인, 다문화가정,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려를 다룬 기사를 많이 소개 한다. 모두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사회적 강자로서 배려하는 쪽의 의무와 책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모든 일은 의무나 책임의 성격을 갖게 되면 힘들어진다. 재미도 없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배려는 의무나 책임이 아니다. 배려의 사전적 의미는 ‘짝처럼(配)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慮)’이다. 가까운 사람(짝)을 대하는 마음은 의무와 책임이 아니다. 기꺼움이다. 상대가 기분 좋으면 나도 기분이 좋다.
미국 CNN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도널드 트럼프가 “당신처럼 세상에서 성공하는 첫 번째 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말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물론 ‘Make America Great Again(다시 미국을 위대하게)’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되기 훨씬 전에 사업가로서 한 말이다. 좋아하면 자주, 많이 하게 되고, 그리 되면 잘하게 되고, 잘하게 되면 대체로 성공한다는 논리였다. 그럴 듯해 보였다. 배려가 기쁜 행동이 되도록 하면 어떨까. 강자로서, 부자로서, 지식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식의 인식은 개입시키지 말고.
이웃나라의 작은 섬에서 잠깐 머물다 와서 필자는 배려의 의미를 새삼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국제신문의 ‘이 한편의 시조’란에 우아지 시인의 ‘배려’가 실렸다(지난달 22일 자). 자목련을 보고 ‘한 템포 늦게 가는 길/ 활짝 핀 감탄사다’라는 구절이 배려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김석이 시조시인은 이 시조를 소개하면서 ‘활짝 피는 봄, 봄은 배려의 마음에서 피어난다’고 언급했다.
변호사·법무법인 청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