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군 정관신도시에 가면 독특한 성격을 지닌 정관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살림살이와 마을을 중심으로 한 생활상을 재현한 전국 최초의 삼국시대 생활사 전문 박물관이라는 게 그 첫 번째. 무엇보다 정관신도시 개발로 고향을 떠난 원주민의 기억을 되새기는 공간을 마련한 게 눈에 띈다. 정관박물관이 탄생한 배경도 흥미롭다. 부산시는 정관신도시 택지 조성 공사 과정에서 발굴 조사된 가동마을 유적 등 삼국시대(4~5세기) 집터와 고상 창고, 가마, 분묘, 토기 등을 한곳에 모아 보존·관리하자는 문화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였으며, 신도시 사업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박물관을 짓고 시에 기부채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관면의 옛 이름 소두방의 ‘생활’과 ‘기억’이 정관박물관 전시 공간에 담겼다. ‘소두방의 생활’ 전시 공간에서는 가동마을 유적을 통해 삼국시대 집안과 마을에 관한 일상의 풍경이 펼쳐진다. ‘소두방의 기억’ 전시 공간에는 신도시 개발로 사라진 10개 마을 주민의 육성 영상도 있다. 박물관이란 공간이 없었다면 발굴조사보고서나 수장고 등에서만 볼 수 있을 법한 내용이다. 이는 ‘기억의 방법’으로 주목하는 대목이다. 현장성을 담보하는 것 역시 의미가 있다. 정관박물관은 자칫 잊힐 뻔한 ‘기억 자산’을 어떻게 기억할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흔히 부산 부산진구 서면을 포함한 동천 일대의 역사성에 관해 얘기할 때 ‘대기업 발상지’ ‘한국 신발산업의 메카’ 등을 자주 거론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그룹과 LG화학이 서면을 관통하는 동천 주변에서 출발했다. 대우버스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동명 왕국’으로 불렸던 세계 최대 합판 제조기업 동명목재 역시 동천 유역에 자리 잡았다. ‘K앙고라텍스’라는 고급 양장·양복지를 생산했던 경남모직이 있던 곳이 서면 일대다. 지금은 글로벌 타이어 기업으로 성장한 넥센타이어의 전신인 흥아타이어의 고향도 서면이다. 서면과 동천 유역이 한국 경제의 산실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부산의 신발 산업 역시 서면을 중심으로 둥지를 틀었다. 진양(왕자표) 기차표 말표 범표 등 고무신과 운동화를 기억할 것이다. 바로 진양고무 동양고무 태화고무 삼화고무 등이 생산한 브랜드였다. 부산 신발 대기업 가운데 ‘막내’이던 ‘슈퍼카미트’의 대양고무도 서면에 뿌리를 내렸다.
이들은 흑백사진처럼 추억의 한 장면이 됐다. 서면이 부산 대표 도심으로 발돋움하는 사이 ‘사라졌다’. 서면과 동천 유역에서 태동해 가동되던 제조업체들이 떠난 자리 대부분에는 아파트와 대형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은 LG그룹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현 LG화학)이 사실상 유일하다. LG그룹은 1998년 부산진구 연지동 락희화학 자리에 LG사이언스홀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산업유산의 추억이 제대로 ‘기억’되고 있을까. 현장을 돌며 확인해봤다. 결론은 ‘너무 미흡’이다. 대기업 창업 발상지에 관한 추억의 현장 조형물이나 안내판이 있더라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들 기억 자산의 원래 자리와는 동떨어진 채 길 건너편에 안내판이 있는가 하면 버스정류장 한쪽에 세워놓은 탓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가기 일쑤다. 이는 기억 자산의 의미와 직결되는 공간성 결여를 뜻한다. 산업유산의 추억길 조성을 위해 애를 많이 쓰긴 했으나, 세심한 배려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부산의 대표 신발기업 진양고무가 있던 부산진구 부암동 진양사거리에 황금신발소공원이 세워진 정도는 다소 위안거리가 될 듯하다. 부산진구가 신발산업의 중심지였다는 산업유산의 의미를 되새기고 경제 부흥의 미래를 기약하자는 뜻에서 세웠다. 황금신발 조형물 바로 옆 굴다리 쪽에는 태화고무 락희화학(럭키치약) 경남모직 등 서면 산업유산을 보여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지만, 실제 현장과는 거리가 있다.
송상현광장의 선큰광장과 가까운 서면롯데캐슬아파트 옆 거리에는 ‘서면 근대산업유산 추억길’이란 스토리텔링 지도가 큼직하게 세워져 있다. 이를 통해 흥아타이어(서면롯데캐슬아파트) 대양고무(서면한신아파트) 경남모직(NC백화점 서면점) 제일제당(더샵센트럴스타아파트) 동명목재(ABL빌딩) 등의 옛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지도를 보지 않았다면, 관련 자료를 뒤져보지 않았다면 현장에선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알 만한 사람만 아는 스토리다. 부산상공회의소 1층의 챔버스퀘어에서도 헛헛한 기분이 들긴 마찬가지다. 이 공간은 부산 기업의 역사전시관 격이다. ‘대기업 발상지 부산’과 ‘역사 속 부산 기업’ 등을 강조하는데 정작 ‘현장’에 관한 설명을 찾아보기 어렵다.
편집국 부국장·걷고싶은부산·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i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