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건 2010년 5월 봄날,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서였다. 그날, 금남로는 태극기로 덮였다. 30년 전 그때의 5월처럼 시민과 학생이 금남로로 속속 모였다. 청년들은 ‘광주는 민주의 땅’ ‘계엄군은 물러가라’ 등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주먹을 불끈 쥐어 높이 올렸다. 아낙들은 주먹밥으로 청년들의 주린 배를 채워줬다. 노인들은 길가에 서서 안타까움에 가슴을 쳤다.
계엄군이 도청 입구를 막았다. “폭도들은 해산하라”며 수차례 경고 방송했다. 시민군은 되레 ‘계엄 철폐’ ‘민주 수호’를 더 크게 외쳤다. 애국가가 울렸다. 애국가는 학살의 신호였다. 계엄군이 쏜 총에 시민군은 하나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산 채로 잡혀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짓밟히기도 했다. 계엄군의 대검은 시민군을 난자했다. 한쪽에선 시신을 손수레에 쌓아 급히 옮기며 통곡했다.
죽어가던 한 여성 시민군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소리 질렀다. “제발 우리를 잊지 마세요!”
그때 아수라장 한가운데서 홀로 민중가요를 부르는 그가 보였다. 청바지에 소매 끝이 닳은 청색 점퍼를 입고, 검은색 모자를 썼다. 모자엔 알 수 없는 배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목에는 대한민국 지도를 넣은 액자를 맸다. 검은색 가방엔 ‘5월 정신 계승’이라 쓴 세로로 긴 흰색 종이 위에 신분증과 증명사진이 달렸다.
신분증으로 확인한 그의 나이는 당시 47세였다. 그는 스스로 ‘정신병자’라고 했다. 전남 나주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라며 외출증 같은 걸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열일곱, 꿈 많은 소년일 때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상무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후유증으로 30년째 정신병원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날, 그의 정신은 또렷했다. 그는 “‘정신병자가 왜 나왔느냐’고 무시하지 말아 달라.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싸웠고, 지금도 고통을 겪는다”며 울분을 토했다. 또 “갈수록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줄어 속상한 마음에 용기를 내 금남로에 왔다.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9년 전, 난생처음 찾은 광주는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5·18 30주년을 맞아 열린 대규모 재연행사를 취재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금남로에선 30년 전, 1980년 5월의 광주가 그대로 재연됐다. 1980년 5월 죽어가던 시민군의 마지막 외침은 “우리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30년간 정신병원에서 버틴 그의 절규 역시 “우리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억해 달라는 그의 바람은 이뤄지는 듯했다. 정말 봄날이 오나 했다. 2017년 현직 대통령은 5·18 37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고 했다. 이어 “5월 광주를 왜곡·폄훼하려는 시도는 용납될 수 없다”며 완전한 진상 규명을 약속했다. 지난해 3월엔 진상 규명 특별법이 제정됐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출범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차라리 5·18을 기억하지 말아야 할 몇몇이 쓸데없는 기억을 꺼내는 바람에 나라가 시끄럽다. 자유한국당 ‘세 의원님’ 얘기다. 이 ‘괴물 집단’의 저급한 망언은 지면의 격이 떨어질까 염려돼 옮기지 않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하자. 의원님들을 그냥 둬선 안 된다.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이니, 아예 이들의 기억에서 5·18을 지워주는 편이 낫지 싶다.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게 있다. 일을 완전히 끝내지 않으면 마음속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는 게 대강의 정의다.
이참에 완전히 끝내자.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세 의원의 징계안을 내고 제명 절차에 착수했다. 또 5·18에 대한 왜곡·날조·비방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 개정안, 일명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법’을 발의하기로 했다. 제1 야당에 흠집 정도 낼 요량으로 허투루 하거나, 쇼하지 말자. 확실하게 끝을 봐서 세 의원이 다시는 5·18에 관한 왜곡된 기억을 꺼내지 못하게 하자.
아직도 춥다. 그래도 곧 봄날이 오려나. 내년은 5·18 40주년이다.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