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와 위안부의 차이점을 서술하시오’.
15년 전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던 기자는 한 언론사의 논술 시험지를 받아들고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신대와 위안부가 같은 개념인 줄로만 알았고,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는 게 아는 것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백지를 내고 시험장을 빠져 나오며 심하게 자책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본군 위안부’ ‘정신(근로)대’ 문제는 물론 여성 인권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시기가 아마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인터넷과 관련 서적 등을 뒤적이며 가장 먼저 접한 이름이 지난달 28일 세상을 떠난 김복동 할머니였다. 1993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이후 전 세계를 돌며 피해 사실을 증언하며 인권운동가로 살아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많은 생각을 갖게 됐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광복 이후 고국 땅에 돌아왔을 때부터 김 할머니의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밝혀지기까지 ‘침묵’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과거의 고통은 다른 사람에게 숨겨야 할, 부끄러운 것이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고, 남편과 자식들에게 과거를 들킬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김 할머니는 용기를 내 피해 사실을 알렸고, 일본군 위안부뿐만 아니라 성폭행 피해로 고통받는 전쟁·무력분쟁지역 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대두되는 기폭제가 됐다.
그랬던 김 할머니는 평생 소원이던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끝내 받아내지 못한 채 고난했던 삶을 마감했다. 할머니가 눈을 감기 전 남긴 마지막 말씀은 “끝까지 싸워달라”였다고 한다. 일본에 대한 분노와 함께 후손들이 자신의 뜻을 이어가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 있는 유언이었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는 김 할머니가 생전 줄곧 말씀하셨던 문구가 쓰여 있다. ‘우리에게 아직 해방은 오지 않았다’. 광복 74주년,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생존한 23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겐 해방이 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하늘에 있는 김복동 할머니에게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안겨드리는 건 후손들의 몫이다. 김 할머니의 외침에 우리가 답할 차례다.
사회부 차장 junny97@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