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 앞서 신년사를 발표했다.
대통령의 신년사는 그해의 정책기조를 드러내기에 나는 유의 깊게 신년사 전문을 읽어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신년사라면 으레 들어가고도 남아야 할 두 분야, 노동과 교육에 대한 얘기가 쏙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내가 빠뜨리고 읽었나 싶어 다시 정독했지만 역시나 노동과 교육에 관해서 문 대통령은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의구심과 당혹감을 억누른 채 생각해봤다. 왜 노동과 교육을 쏙 빼놓은 채 신년사를 작성한 것일까. 이 정권에겐 노동과 교육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노동과 교육은 이제 건너뛰어도 좋을 정도의 의제란 말인가. 아니면, 노동과 교육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노동과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말인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법이 없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언급을 회피한 것인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여기선 노동문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그 공을 넘겨버리고 노동계를 압박하는 것으로 그 정책기조를 드러냈으니 말이다.
문재인 정권은 일부러 교육정책에 대한 비전을 신년사에서 빠뜨렸을 것이다. 해법이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괜히 언급했다가 소란만 키우느니 그저 모르쇠하고 넘어갈 수 있으면 넘어가자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속셈으로 교육에 대한 비전을 내놓지 않았다면 이것은 직무유기이고 직무태만이요, 복지부동이고 배임행위가 아닌가.
사람살이의 가장 근본이 되는 교육에 대해 인간됨의 기본, 아니 공동체살이의 근본을 가르치는 교육에 대해 국가의 수장이 어떤 정책이나 비전도 제시하지 않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설사 준비가 부족했다 하더라도, 설사 비판과 반대에 놓인다 하더라도, 설사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올지라도 국가(공동체)를 존립시키는 가장 근본이 되는 교육 문제에 대한 비전과 정책을 내놓지 않고 어떻게 국가를 운영한다는 말인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비록 제대로 된 해법이 아닐지라도 비전과 정책을 내놓아야 찬성이든 반대든 의견 개진이 있을 터이고, 그에 따른 토론과 비판과 연구와 궁리를 통해 좀 더 나은 비전과 정책을 수립할 수 있지 않을까. 국가공동체가 정권을 잡은 5년, 혹은 정권을 연장한 10년만 운영하면 끝인 것인가.
교육은 10년, 20년을 가름하는 단기적 의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온 공동체의 희망, 전망에 관한 의제다. 그것은 기껏해야 5년, 10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정권 따위가 배제하거나 무시하거나 폄훼할 수 없는 역사 자체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 땅에는 새벽별을 보고 나가서 새벽별을 보고 들어오는 수험생이 있고, 4각의 교실에서 4각의 칠판을 두고 4각의 책상에 엎어진 채 사각사각 영혼을 갉아 먹히는 입시생이 있고, 수학과 영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당하는 지옥 같은 경쟁적 입시제도가 있다. 여기에 국가가 관리하는 공교육이 있는데도 다시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식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부모들이 있는 세상이 아닌가. 부모의 부가 진학을 보장하는 사회가 아닌가.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이런 문구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사람 중심 경제, 함께 잘 사는 사회, 국민과 모든 지역이 성장하는 사회’. 만약 저 말들이 이 정권의 진심이라면 사람 중심이 아닌 성적 중심의 경쟁적 입시교육을 넘어설 수 있는 비전을 제시했어야 했다.
사람 중심의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사람 중심의 교육에 대한 설계도라도 내놓아야 했다. 초중고생과 대학생이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까 그들도 엄연한 사람이라면 그들을 배제하지 말았어야 했다. ‘함께 잘사는 사람 중심’의 사회라면 그 어떤 사람도 배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쟁해서 이겨야 살아남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면, 당락이 인생을 결정하는 세상이 아니라 선택이 인생을 결정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작가·헤세이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