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남구 우암동 소막마을과 관련된 길을 취재할 때다. 애초 산수도마을 가는 길에 만나는 동항성당에 큰 방점을 찍지는 않았다. 아직 피란민의 체취가 남아 있는 좁은 골목길을 걸어 내려간 뒤 동항성당 앞에 이르렀을 무렵, 느닷없이 성당을 찾고 싶어졌다. 동항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하 안토니오 몬시뇰(1922~2017)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으로 전쟁포로까지 경험한 하 안토니오 몬시뇰. 그는 ‘달동네의 성자’로 불렸고 평생 부산을 사랑했다. 6·25전쟁 이후 동항성당의 지역 빈민 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은 반드시 그와 직결된다. 미국과 독일에서 받은 원조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고,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어버이가 됐다. 한독여자실업학교를 세웠는가 하면 성당에 조산원을 마련해 신생아 2만6000여 명이 태어나도록 도왔다. 명예 부산시민이던 그는 부산의 ‘기억 자산’이다.

무대를 영도로 돌려보자. 지난해 말 절영해안산책로를 즐길 ‘흰여울 해안터널’이 개통됐다. 사업 시행 1년6개월 만이다. 보행 터널로, 길이는 70ｍ 정도. 해안길을 가로막은 암벽을 뚫었다. 마침 지난 9일에는 오거돈 부산시장이 이곳을 찾아 ‘사람 중심 보행 혁신종합계획’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대목이 있다. 해안 터널의 마감재가 FRP(섬유강화플라스틱)다. 암벽 재질을 그대로 살려놓았더라면…. 벼랑 끝이란 환경을 최고의 바다 전망으로 바꿔놓은 흰여울문화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엉뚱함 그 자체다.

FRP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또 있다. 용두산공원 내 초량왜관 터 표지석이 자리 잡은 ‘석축’이다. 말이 석축이지 이것도 FRP다. ‘스토리텔링의 보고’인 용두산공원을 망친 격이다. 용두산공원에는 조선 후반 일본인의 전관 거류지 초량왜관이 있었다. 초량왜관의 우두머리인 관수가 머물던 관수옥 자리에는 지금도 돌계단이 남아 있다. 부산시가 오는 2022년까지 총 1조837억 원을 투자해 ‘모두 다 같이 걷는 부산’을 조성한다고 발표했는데, 용두산공원 주변의 역사를 복원해 정말 ‘다 같이 뜻깊게’ 걷는 곳으로 가꾸면 어떨까. 이는 기억의 자산을 올곧게 재생하는 길이기도 하다.

‘초량’은 지금의 동구 초량동 일대보다 훨씬 넓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초량항은 절영도 안쪽에 있다고 했다. 영도 인근 모든 부산항 해변을 초량항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 초량은 일본 무역상에 맞서는 조선인의 교역 중심지이자 객주업이 활발했던 지역. 함경도의 명태, 강원도의 목재, 전라도의 곡물이 바닷길을 통해 초량에 들어온 뒤 경부선 철도를 따라 전국으로 수송됐다. 초량은 물류 중심지였다. 이런 배경에서 1900년대에 남선창고(南鮮倉庫)가 초량에 들어섰다. 무역항 근대도시 부산의 상징이었다. ‘부산 토박이치고 남선창고 명태 눈알 안 빼먹은 사람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런 남선창고는 2009년 사라졌다. 부산항 기억의 자산이 소멸했다.

1911년 준공된 옛 부산세관 청사도 마찬가지다. 옛 부산세관 청사는 붉은 벽돌과 화강석을 사용해 영국풍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지어졌다.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제22호)였음에도 1979년 도로 확장 공사 때 헐리고 말았다. 옛 부산역, 조흥은행 부산지점, 백산상회 등 주요 근대건축물들도 사라졌다. 옛 부산역 터는 표지석으로 부산도시철도 중앙역 12번 출구 옆에 최근 세워졌지만, 이 또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

국제신문은 대안사회를 위한 일상생활연구소와 함께 2012년 ‘부산은 무엇을 기억하는가’라는 시리즈를 다룬 적이 있다. 시민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기념비 같은 부산의 ‘기억 자산’을 재조명해 부산의 정체성을 되짚어보고 문화·관광자원으로 끌어올리자는 취지였다. 시리즈를 마친 뒤 부산시는 공공조형물의 체계적 관리에 나섰다. 대학 등 지역사회에 부산의 기억을 자산화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끌어낸 것도 성과였다. 그 덕분에 ‘이달의 기자상’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부산시가 나설 차례다. 이제는 철학의 문제다. 철학이 있다면 FRP로 덧씌우는 일도 없다. 기억 자산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 경성대 강동진 교수의 지적처럼 ‘한때는 빨리 없애고 싶어 했고 덮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히 했던 것이 지금은 부산의 보석이자 비전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근현대의 소소한 흔적과 기억들을 날것 그대로, 제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치장은 보석이 될 원석을 망칠 수 있다. 단지 보기 좋은 게 좋은 것은 아닌 까닭이다.

여기에 하나 더. 각종 건축물의 신축 허가 때 경관 심의를 강화해야 한다. ‘규제 강화’는 이럴 때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는 문화관광 자원의 관점에서 접근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수다. 그래야만 기억 자산에 엉뚱한 건물이 생겨나 전체 경관을 망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오광수 편집국 부국장 걷고싶은부산·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i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