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군 선생의 유작 ‘부산 이야기 62마당’(2009년)에는 부산진(釜山鎭)의 역사적 유래가 나온다. 그에 따르면 부산진은 원래 좌천동 지역이었다. 수군의 군사진영이 조선 초부터 부산이란 산 아래의 이곳에 있어 그렇게 붙여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 진영이 범일동 자성대성으로 옮겨졌고, 조선 후기부터는 좌천·범일동 일대를 부산진이라 불렀다는 얘기다. 오늘날 좌천·범일동의 행정구역이 동구로 돼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됐다. 당시 부산부(府)가 지금의 부산진구 지역에 출장소를 설치하면서 부산진출장소라고 명명한 것이 1957년 구제(區制) 실시 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런 부산진 출신 중에는 민족 의식과 기개 높은 지사가 많았다. 개화기 부산 최초의 근대교육기관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한 박기종, 일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 의사,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몸 바친 최천택,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 양한나, 만주 독립군 훈련에 헌신한 최상운 등이 대표적이다. 일찍이 우리 국방의 요새를 지키고, 왜적 침략에 맞서 싸운 선조의 영향을 받았다. 1919년 3월 경남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이 부산진 일신여학교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현재 좌천·범일동의 평지 대부분은 일제시대 바다를 메워 조성한 매축지다. 조선 수군 진영의 바로 앞바다였던 셈이다. 매축지는 일제가 군수 물자를 나르기 위해 만든 것으로, 1930년대부터 마을이 형성됐다. 6·25전쟁 때에는 피란민들의 판자촌으로 바뀌었다. 반세기 넘게 흐른 지금도 1950, 60년대 삶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비록 낙후됐으나 부산의 근현대 모습을 간직한 지역이라 역사문화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부산시가 이 같은 매축지 마을을 보존하기 위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올해가 3·1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이니 더 뜻깊고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진작에 했으면 좋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을 가구 중 상당수가 벌써 비어 있거나 폐가로 방치되고 있어서다. 젊은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고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은 까닭이다. 이대로 계속 뒀다가는 재개발 바람에 휩쓸려 사라질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주민들이 마을을 지키려는 의지가 남다르다는 점이다. 지난해 초 이곳 복지법인은 매축지 내 8곳을 전국 최초 개념인 ‘마을 문화재’로 자체 지정해 보호에 나섰다. 여기에다 등록문화재가 되면 금상첨화다. 그와 아울러 옛 부산진의 민족 정신이 면면히 흘렀으면 좋겠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